외국인이 그린 옛 우리나라 풍물, 인물 등










고종황제 초상. 이 그림은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1898년 그린 그림이다.
보스가 한국을 방문한 기간은 짧았으나,
당시의 정세를 잘 통찰하였고,
그림 속의 고종 황제의 불행한 일생과 한국의 불운,
일본의 횡포 및 한국인의 우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서전 속에 기록하고 있다.
보스의 그린 자신의 초상을 본 고종은 사진과 같은 유화의 ?! 營퓬봇? 대단?! ? 만족하였다고 전해진다.

"일본인들은 한국미술의 모든 건축 유적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미술가들을 포로로서 일본에 끌고 가 작품을 만들게 하는 한편 일본인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일본 미술은 오늘 날까지도 매우 한국적인데....
제가 그린 민상호의 초상화를 황제가 보신 후
저는 황제폐하 및 황태자의 실물크기 전신 초상화를 그리라는 어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개인이 소지하기 위해 황제의 전신상 하나를 더 그려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
저는 황제로부터의 선물, 그리고 황제와 그 백성들의 장래에 대한 슬픔 예감을 안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

 

문신 민상호. 휴버트 보스의 작품으로 1898년 작이다. 민상호는 구한말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 민치덕의 아들이다.
 보스가 민상호를 특별히 그리게 된 동기는 민상호가 한국인의 가장 순수한 형이라고 생각하였고,
그의 매력과 높은 지식 수준에 깊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연초록의 선비복을 입은 근엄하고 세련된 민상호의 모습을 보스는 사실적인 필치로 잘 묘사하고 있다.


서울 풍경. 휴버트 보스의 1898년 작품.
이 작품은 구한말 지금의 정동에 있는 미공사관 쪽 에서 경복궁을 내려다보며 그린 것으로
멀리 광화문, 경회루, 북한산 등이 보인다.
때는 초봄으로 그림 왼편에 보이는 기와집 마당에는 복사꽃이 한창 피어있다.
보스는 1911년 친구에게 보낸 자서전적 서한에서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한국은 가장 흥미있는 나라 중의 하나이다.
 언덕과 골짜기, 고요한 강, 꿈같은 호숫가에 정말로 아름다운 꽃들이 자라고 있었으나,
그 국민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인종 중의 하나로 늘 유령처럼 흰옷을 입고 마치 꿈 속에서처럼 조용히 걸어 다니지만......



나가사키 수용소 내의 조선인들.
지볼트가 그린 그림이다.
지볼트는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독일인 의사로 1823년부터 1829년까지 6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 연구에 심취했다.
이 과정에서 1823년 3월 조난으로 나가시키에 체류 중이던 조선인 어부와 상인들을 만나 조선에 관한 지식을 수집하였다.
이 삽화는 수용소 내에 모여있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담았다.
검은 갓과 겨울용 난모를 쓴 조선인들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커다란 고 있다


바둑 두는 조선인들. 윗 그림과 같이 지볼트의 그림이다.
상투 머리에 흰색 한복을 입고 긴 담뱃대를 물고 있는 모습에서 한국인의 특징이 강하게 부각되어 있다.
그러나 바둑알이 놓여 있는 바둑판은 일본 것이다.


한국인을 총살하는 일본군.
러일전쟁 중 러시아 측에 정보를 제공하였다하여 일본군이 한국인을 체포하여 총살형을 집행하고 잇다.
 나무에 묶인 한국인을 향해 여섯명의 군인이 총구를 겨누었고 장교가 지휘하고 있다.
뒤 편에 갓쓰고 두루마기 입은 한국인들이 서 있다.
이 충격적인 장면은 일본인 종군 화가가 스케치한 것을 보고 스튜어트(Allan Stewart)가 그렸다.


국치일 풍경.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조약이 공포되었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대한제국은 조선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본군인이 총검을 꽂은 채 궁성을 지키고 있고,
그 아래에는 한국의 여인들, 긴 담뱃대와 갓 쓴 남자들, 노동자 등 몽타주 수법으로 그렸다.
우드빌(Canton Woodville) 그림.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10년 9월 17일자에 실렸다.


자동차를 보고 놀라는 한국인들.
영국 화보지 [그래픽] 1909년 2월 20일자에 실린
이 그림의 제목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나타난 자동차'인데 '
코리아의 수도에 처음 출현한 자동차의 시위'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원래 이 그림은 [대한매일신보]에서 일했던
알프레드 맨험이 촬영한 사진을 바탕으로 크롬비에가 익살스럽게 그린 것이다.
알프레드 맨험이 잡지에 기고한 사진 설명을 들어보자.

" 내 사진은 서울 도심에 처음 등장한 자동차를 찍은 것이다.
이 그림은 서구 문명이 만들어 낸 최신의 성과라 할 수 있는 자동차가,
서구인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을 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세계의 한 구석에 위치한 조선에 어떤 식으로 침투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보여 줄 것이다.
이 차는 30마력의 증기차이다.
대로변을 지나다가 이 차를 처음 본 한국인들은 혼비백산해서 사방으로 흩어졌고,
심지어 들고 있던 짐도 내팽개친 채 숨어 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새로운 괴물로부터 자신을 지켜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했다.
짐을 싣고 가던 소와 말도 주인들만큼이나 놀라 주위의 상점이나 가정집으로 뛰어 들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황제.
이 초상화는 프랑스 화가 드 라네지에르가 1902년 그린 것으로
1903년 발간한 [극동의 이미지]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고종의 인상에 대해 "우아하고 선량하며 성격도 쾌활하며 영리하다"고 적고 있다.

소를 약탈하는 청나라 군인들,
이 그림은 영국 [그래픽]지 1895년 3월 9일자에 실린 것으로 잡지의 종군 기자이자 화가였던
후리프가 청일전쟁 당시 조선에서 목격한 장면을 스케치한 것이다.
그는 이 그림과 함께 기사를 통해 청일전쟁 당시
청나라 군인들이 조선 백성에게 저지른 각종 만행에 대해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힘 없고 불운한 조선인들에 대한 청나라의 태도는 대단히 고압적이었다.
그들은 조선인들을 마치 정복국의 주민을 대하듯 위협하고 있었다.
청일전쟁 개전 초기에는 무지비한 강간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당시 청군의 병참부는 조직 등 모든 것이 매우 낙후되어
병사들특히 로 하여금 조선 주민들로부터 식량 등 필요한 물자를 자체 조달토록 하였다.
이를 거부하거나 반항하는 소유주들은 즉시 총살하는 등 무지막지하게 다루었다.
삽화에서 보듯이 그들의 약탈에 반항하는 소 주인을 무참히 총으로 쏘는 장면은 당시의 참혹했던 현장을 일깨워준다......
당시 청군들은 그들의 일상 양식인 쌀, 배추 등을 현지에서 조달하고 요리하는데 매우 숙달되어 있었다....
청군들은 오합지졸이었고 기강도 해이했으며 전쟁에 대한 관심도 부족한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증폭했으나 그들이 전투에서 보여준 전투력을 보잘 것 없었다. "


일본군과 한국인들.
이 화보는 프랑스의 르 몽드 일뤼스트레(1894)에 실린 것으로 평양 전투 후
의주로를 따라 패주하는 청군을 뒤쫓아 북상하는 일본군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주의를 끄는 것은 노변에 앉거나 서서 이들 모습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처량한 모습이다.
상체를 벗은 채 발을 뻗고 있는 소년,
또 엄마의 치마를 붙들고 벌거벗은 채 서 있는 아기의 모습이 일본군의 구둣발과 대조되어 가슴에 와닿는다.


고종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루스벨트양.
이 그림은 프랑스 르 프티 파리지앙 1905년 10월 8일자에 실린 것이다.
 미국의 26대 대통령인 대어도어 루스벨트(재임 1901-1909)의 딸인 엘리스 루스벨트는 여행을 좋아해서
세계 각국을 돌아 다녔다. 그러나 대통령 영애는 그 어느 곳에서 보다 한국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관리들은 한국의 오래된 관습을 무시하고 그녀가 고종을 알현할 수 있게 했으며
황태자와 대신들과 더불어 식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약혼자 및 경호원을 대동하고 왔는데
당시의 고위 관리들은 이 미국인 말괄량이 아가씨를 상대로 한미 공수동맹(共守同盟)을 맺으려 했다.

고종황제를 알현하는 서양기자들.
영국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1904. 8.27일자에 실린 삽화.
러일 전쟁 취재를 위해 한국에 온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 특파원들이 고종을 알현하고 있다.
단상 왼쪽이 고종이고 오른쪽은 황태자,
단 아래서 특파원을 대표하여 영국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의 빌리어스 기자가 명함을 건네주고 있다.
명함을 받는 군복 입은 사람은 시종 무관장인 듯하다.


조랑말을 타고 팔도여행을 하는 서양인들 (1894년 영국 신문)


궁중내시.
이 그림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가 펴낸 [Old korea](1919)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궁중 내시를 그린 그림이다

민씨가 규수.
이 그림은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가 펴낸 [Old korea](1919)에 실려 있는 그림이다


隱遁王國의 未地世界를 탐험하면서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July,1919




1919 7, National Geographic Magzine,



은둔왕국의 미지세계를 탐험 하면서 by Roy C. Andrews
W. H. Taft 뉘긴가?



箸者 자시니 직접 찌근 사진들


저자가 탐험 한곳. ''청진''으로 부터 함경도를.
백두산 spell Paik Tu San으로 올케 표기.



겨론한 11살은 갓을 쓰고 겨론 아이한 47살은 갓을 몬쓰고---,



서울에서 나드리하는 녀인덜, Mohammedan Mode 갓따고---,.



조선 농부 아낙네들의 운반법. 근육이 남정내 모찌 안타고----,



미역을 지고 가는 지게꾼, 트기하고 유일한 운반 방법.



Malaria
걸린 아해가 뒤에 ''부적'' 달고 치료를 바란다.



함경도 어느 도시의 Main Street



Tiger Hunting Lodge.
인도 호랑이 보다 후월씬 좃탄다.



명태 자비, ''김치'' 에도 너으면 마시 최고란다.



압록강의 듕귁 . 워낙! 급류라 가로 지르는데 7~8 걸린다 한다.



전기 동력으로 찐는 방아



아궁이로 불때서 완방 하는 ! 트기한 방법. 서양보다 좃타?




전형저긴 북쪽 . 벽이! 진흘기고, 지붕은 볏짐 이다.



갓과 망건을 보호하는 비올때 쓰는 모자우산.



''
무산'' 지나는 성문. 이곳 지나면 문명 세계와 결별이다.



''
무산'' 인는 공자 ! 과거 시험 장소. 50녀니 너믄 .



사냥꾼이 자븐 동물 지고---, 뜨뜨탄 동물 '''' 마시면 최고라 민는다.



길목에 인는 성황당. 惡神으로 부터 보호 바드려---, 유교 풍습이란다.



''
혜산진'' 인는 자연 성채, 듕귁과 시끄러븐 고시란다.



장례식 하기직전 ''상복'' 이븐 살암덜. 흰색을 입는다고----,


The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1919
, 7 파네
''
朝鮮'' 에대한 그리 이써 올린다.
당시는 일년 구독료가 $ 2.50 인데--.
Page 24~48
걸처 英國人 탐험가 Roy C. Andrews
咸鏡道 북쪽을 탐험 하며 그리다.
저자 자시니 직접 사진 찌그며 설명 부친기 정화카고 이따.
아마도 National Geographic Magazine 쓰여진 韓國에 관한
최초 그리 아인가 생각된다. 1924, 1933년에도 실렷따

 

100년전의 서울의 모습과 생활상 (진귀본)

100 년전 (경성)서울



























































































 

 

 

 

 

 

 

100년전 어느 선교사가 찍었다는 이 사진들은

  흑백사진에 컬러을 입힌 모습이라고 합니다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와 그림들

1

 

▲ 점치는 풍경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임. 점보는 풍경을 그린 것 같은데 복장이
한국인의 복장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음.

3

▲ 제물포 풍경과 양반.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로 제물포항과 양반의 모습을 그렸음.

 

4

▲ 서울 풍경과 조선군.
1867년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6

▲ 비인 현감 이승렬.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한국의 모습이 서양인에 의해
처음 그려진 시기는 19세기 초이다.
1826 2척의 영국 함대가 백령도 등 서해안 탐사 중에
조선인들과 수차례의 접촉 기회를 가졌으며,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해안 지역을 방문했다.

당시 이들의 체험담은 1817년 알세스트호의 군의인 맥레오드와
1818년 라이라호의 함장 바질 홀에 의해 각각 항해기로 출간되었다

이 그림은 바질 홀 함장의 항해기에 게재된 그림으로
홀 일해의 상륙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비인 현감 이승렬의 모습이다.
홀 함장은 귀로인 1817 8 12일에 아프리카 서해안의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유배중이었던 나폴레옹을 방문하였다.

나폴레옹과 홀은 남다른 인연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피리의 브리엔느 유년 사관학교에 다닐 적에
나폴레옹은 그가 가장 아끼던 후배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홀은 그가 스케치해 온 조선의 풍물을 보여 주었더니
당대의 영웅 나폴레옹도 갓을 쓰고 흰 수염을 한 노인을 가리키며,
", 이 긴 담뱃대, 참 보기 좋다.'라며 매우 신기해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조선에 대해서도 여러가지로 물어 보았다고 한다.

이때 홀은 대답하기를, '이 나라는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어서 이제까지의 유서 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남의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는 선량한 민족'이라고 설명했다.
이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빙긋이 웃으며,
'이 세상에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 보지 않은 민족도 있다더냐?
내게 다시 천하를 통일한 다음에는
반드시 그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보리라'고 말했다.

 

7

▲ 조선의 관리와 수행원.
이 그림은 맥레오드의 항해기에 실려있는

그림으로 관리들의 큰 모자와 담뱃대, 그리고 일산 등이 그려져 있다

 

8

소청도 주민들.

이 그림은 맥레오드의 항해기에 실려있는 그림으로 소청도 주민들을

그린 것이다. 뾰족하고 커다란 모자를 쓰고 긴 담뱃대를 들고 있는

조선인들 그리고 어촌의 초가 등이 특징있게 부각되어 있다

 

9

▲ 배재학당 교사.
아펜젤러가 촬영한 배재학당 교사의 모습.

 

10

▲ 엿장수 소년들. 독일에서 발행된 엽서.

 

11

▲ 외국에서 발행된 엽서로 추산이라는 곳의 거리 풍경임.

추산이 어디인지...

 12

▲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여인들.

조선시대에는 딸을 낳으면 크게 환영받지 못한데 비해,
아들을 낳으면 집안의 경사일뿐만 아니라
아들을 낳은 여인은 '누구 누구의 모친'이라는 경칭을 얻고
시댁에서의 발언권이 확실해진다.

이런 가부장적 태산(胎産) 문화 속에서
심지어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이란 비법도 유행했다.
전녀위남법이란 '임신 중 여아를 남아로 바꾸는 방법'을 말한다
가문을 이을 자손을 낳지 못하면
소박맞는다는 생각이 널리 펴져 있었던 시절,
후사를 잊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기울이게 되고
그 가운데 '임신 중여아를 남아로 바꾼다'
이른바 전녀위남법을 시행하게 된 것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여인들'이다.
가슴을 내놓는 행위는 젖먹일 아들이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었고 흠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었던 것이다.
서양인들의 기록에는 매우 흥미롭게 이러한 여인들을 기록하고 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오는 도중에나 서울에 있는 동안에도,
밖에 나와 있는 여자들이 드물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밖에 나와있는 여자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독특한 방식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일 경우에는 젖가슴까지 내놓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자일 경우에는 매우 박색인 까닭으로
처음에는 이 사실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손 그렙스트 『코레아 코레아』1904)

시골보다는 서울에서 더 많이 보이는 여인들의 외출할 때 모습은 더욱 이색적이다.
외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위험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문 밖을 나설 때는 꼭 동방 마호메트 여인들처럼 몸과 얼굴을 가리고 다닌다.
머리 위까지 녹색 장옷을 뒤집어쓴 모습은
마치 몸체가 보이지 않게 요술 수건을 쓴 유령이 돌아 다니는 듯하다.

이렇게 몸을 칭칭 감싸면서까지 여성의 미덕을 보존하겠다는 가냘픈 조선 여인의 태도는
모슬렘이나 터키 여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점이다.
이렇게 몸과 얼굴을 싸서 감춘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거북스럽고 불필요한 의상을 조롱이나 하듯이 유방은 내놓고 다닌다.
(독일 기자 지그프리드 겐테  1901)

13

▲ 온돌, 감자를 굽듯 사람을 굽다.

1093년 영국에서 발행된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실린 사진. 구들장(온돌)을 놓는 모습이다.

 

한국의 가옥들은 한결같이 나즈막한 단층이며
2층으로 된 서민의 집은 찾아볼 수 없다.
한국 가옥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점은 동양에서
오로지 그들만이 고안해 낸 온돌이라는 난방장치를 사용한다는 점인데,
실제로 아주 훌륭하고 독창적인 것이다.

한국의 집은 땅을 파고 기초 공사를 하는 게 아니라
지면 위에 그냥 짓기 때문에 방바닥이 지면보다 약간 높아
온돌이라고 부르는 공간 사이에
나무나 짚 등을 때어 바닥을 덥히면 방안 전체가 훈훈해진다.
(이탈리아 총영사 까를르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 1904)

한국인들은 거의가 초가집에서 살고 있으며
기와집은 200호 중 한 집이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물다.
이러한 한국인들이 서양보다도 먼저 난방 장치를
활용해 왔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방바닥 밑으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 더운 연기가 지나면서
충분한 열기를 만들어 내는데 설치 방법도 간단하다.
이렇게 기막힌 난방법을 세계 속에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프랑스 여행가 듀크로끄)

아궁이 밑에서 때는 불의 열기와 연기가 구들장 사이를 지지면서 방바닥을 덥힌다. 이러한 난방은 겨울철에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따뜻하게 지낼 수 있기 때문에 연료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확실히 권할 만하다. 사용하는 땔감도 나뭇가지나 통나무 등 저렴한 것이며, 이마저도 없다면 잡초, 나뭇잎 등 어느 것이라도 땔감으로 활용된다. 이 때문에 한국의 서민들은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 사람들보다 따뜻한 집에서 살고 있다.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

 

그런데 온돌방은 아랫목과 윗목의 온도 차이가 커서 불이라도 많이 땐 날이면
아랫목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지 못할 정도로 뜨거웠다.
100년 전 우리 나라를 여행했던 서양인들은 '따뜻함'을 훨씬 뛰어넘은
'뜨거움' 때문에 밤잠을 잘 이루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들의 기록에는 '사람을 굽는다'라든가 '사람을 지진다'
또는 '사람을 익힌다'는 표현도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방안의 '냄새'도 그들에게는 고통이었다.

문이나 창문만 열어 놓지 않으면 오랫동안 보온이 되어
상당히 편리했으나 겨울에 방 안에는 신선한 공기가 너무 결핍되어 있는 것 같았다.
코레아 사람들은 실외에서는 옷을 아주 따뜻하게 입었고,
밤에는 펄펄 끓는 방바닥 위에서 빵처럼 구워지는 게 아주 익숙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불편한 잠자리였다. 방바닥이 너무 뜨거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자 일어나 문을 열어 젖혔으나
얼마 후 추워서 다시 닫을 수 밖에 없었고, 오분 후에 똑같은 짓을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아무리 신선한 공기가 많이 들어와도 방안의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늘과 오물 냄새는 방 안에 아주 배어 있었다.
이 냄새가 순간적으로 심해질 때가 있어 그럴 때에는 속이 뒤집히려 했다.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의 <코레아 코레아 > )

 

방은 보통 가로 2.5미터, 세로 1.8미터 가량되는 조그마한 것이다.
그 곳은 열기와 벌레들, 빨래할 더러운 옷가지들과 '메주'라고 하는 간장을 만들기 위해 발효시키는 콩,
그리고 다른 저장물들로 가득 차 있어 누워 잘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만은 남겨두고 있다.
밤이면 뜰에 밝혀진 너덜너덜한 등롱과 방의 등잔불이 손으로 더듬거리며
활동할 수 있을 정도의 조명을 제공한다.
조랑말의 말린 똥까지 때는 여관의 방은 언제나 과도하게 따뜻하다.
섭씨 33도 정도가 평균 온도이며, 자주 35.5도로 올라간다.
나는 어느 끔찍한 밤을 방문 앞에 앉은 채로 새운 적이 있는데 그때 방안의 온도는 섭씨 39도였다.
지친 몸을 거의 지지다시피 덥혀주는 이 정도의 온도를 한국의 길손들은 아주 좋아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1897 )

조선 집은 나지막하고 방의 크기는 약 6척 높이에 넓이는 8척 쯤이다.
이 나라에서는 나무를 아껴 써야 하는데도,
밖의 기온이 영하 1520도로 수은주가 내려가면 사람들은 방이 뜨끈뜨끈하게 불을 땐다.

온돌방 밑에 네 골을 만들고 그 위에 얇고 넓다란 돌을 덮어서
그 위에 다시 흙을 바르고 맨 위에 기름에 절인 종이를 바른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방바닥은 우리 서양 사람들이 빵을 구어 낼만큼 뜨겁지는 않아도, 방바닥이 얼마나 뜨거운가를 경험해보지 않은 여행자는 까딱하다가는 엉덩이 살을 지지기에 꼭 알맞다.
이 곳 사람들이야 수백 년간 습관이 들었기 때문에 이 뜨거운 방바닥에서도 한편으로 돌아누운 채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잔다.
(1902년 애쏜 써드의 『서울 견문록』중에서)

▲ 궁궐 수비대.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

실려있는 사진으로 '궁궐 수비대'란 제목이 붙어있다

14

▲ 미혼의 한국소년.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
에 실린 그림으로 'an unmarried korean boy'(미혼의 한국 소년)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15

▲ 고종황제.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에 실려
있는 고종 황제의 사진.

16

▲ 결혼한 한국남자.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
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Korean married man'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음

 

16

▲ 궁궐에서 일하는 여인.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
에 실린 그림으로 제목은 'Woman employed in the palace'.

 

17

▲ 다양한 한국인들.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
에 실려 있는 그림으로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결혼한 여인', '겨울
모자를 쓴 여인', '궁중용 모자', '옛 군인 모자(설명이 잘못된 듯)'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18

▲ 지게를 진 남자.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
에 실려있는 그림으로 지게를 진 한국인의 모습을 그린 것임.

 

19

▲ 황제의 시종들.
콘스탄스 테일러의 책 [Koreans at home](1904)

실려 있는 그림으로
'servants of the emperor'라는 설명이 붙어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