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exandria의 추억

4월 25일은 성 마가의 순교일이다. 주후 62년 애굽의 아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요한이라고 불리든 마가는 지금은 리비아라고 부르는 구레네의 Pentapolis라는 곳에서 출생하고 곧 갈릴리의 가나로 이사를 한듯하다. 아버지는 전승으로는 레위족으로 이름이Aristopolos라고 하고 어머니는 우리가 아는 데로 마리아이다. 어머니는 예수님을 열심히 마지막 까지 섬긴 분이다.

마가복음에서 기록된 겟세마네에서 홑 이불을 두르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벌거벗고 도망첫다고 기록된 청년이 마가, 바로 그 자신의 이야기였다고 알고 있다. 또 그는 70인 제자중 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알다시피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은 최후의 만찬 뿐만 아니고 120문도가 모여 기도할 수 있는 큰 집이었고 베드로가 옥에 갇쳤 다가 나와서 찾아 갔을 때에 하녀가 나가서 문을 열어 준 것으로 보아서 부유한 집안이었든 것 같다.

바울이 첫번 전도 여행 때에 바나바의 추천으로 그의 생질(혹은 사촌)인 마가를 동행케 하였으나 마가가 중간에 돌아가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래서 2차 전도여행 때는 마가를 다시 다리고 가자는 바나바와 다투고 이 두 위대한 전도자들은 헤어지게 된다. 후일 바나바는 사이프르스의 감독으로 있었고, 주후 73년경에 순교를 하였다 한다. 어떻든 마가는 고생을 하지 않고 자란듯하며 그로 인하여 인내심이 적었든 것 같다.

그 후에 마가는 베드로를 열심히 따라다니며 전도에 종사하고 그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마가복음을 기록하였다고 알고 있다. 후일 그는 바울도 도왔으며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를 추천하고 있다. 어떤 전승에는 마가의 고모가 베드로의 아네 였으며 마가의 부친이 사망하자 베드로가 돌보아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베드로서에 그를 “내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고도 한다.


후일 마가가 아렉산드리아에 전도하기 위하여 처음 도착하였을 때에 마침 그의 샌들이 닭아 끈이 떨어졌다. 쉬게 하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면서 가까운 구두 수선소에 신을 갖고 갔다. 마가는 이때 신기리 장수에게 기회를 잡고 전도하였다. 구두 수선만 하든 이 사람이 회개 후 세례를 받고 첫 교인이 되었는데 후일 마가를 이은 아렉산드리아 교회의 2대째 감독이 된 Annianus가 바로 이 사람이라고 한다.

아렉산드리아라는 도시는 마케도니아의 아렉산더 대왕이 주전 332년에 애굽을 정복하고 세계의 중심으로 그리스식인 세 도시를 나일강 하구의 삼각주에 건설하였다. 그리고 자기 이름을 따 붙인 도시이다. 도시는 건설 후에 급 성장하여 세계 교역의 중심항구가 되었다. 그러나 아렉산더가 33세의 젊은 나이로 주전 323년에 사망하자 그의 부하들 중 하나인 Ptolemy가 애굽을 차지하고 그 왕조가 300여년 후 주전 30년 마지막 왕인 크레오파트라 때에 멸망하기 까지 다스렸다. 토래마이 왕국은 애굽이 아닌 희랍 사람들이 다스리든 애굽 왕국으로 헬라화의 기수였고 아렉산드리아는 로마 시대에는 로마 다음의 대도시였다. 인구는 100만명 정도이었고(어떤 기록에는 30만명) 60%가 희랍인이었고 30-40%의 인구가 유대인이었다. 지배 계급의 희랍인들과 교역의 유대인들은 사이가 나빴다. 로마시대 까지도 사이가 나빠서 자주 싸웠다.

문화적으로 토래마이 왕국 동안에 건설된 아렉산드리아 공공 도서관에는 700,000개의 두루마리가 있었다 한다. 또 학문에 관심이 많았든 Ptolemy Philadelphus가 유대인들의 구약을 희랍어로 번역하게 하였는데 이를 70인역이라 하고 성경의 첫번 외국어 역이다. 지금도 희랍 정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성경이다.

아렉산드리아항에는 당시 세계의 7대 불가사의라고 Herodotus가 불렀든 것 중의 하나인 아렉산드리아의 등대가 있었다. 이는 40층 높이의 건물로 유일하게 오랫동안 남아 있든 고대 건축물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주후 4세기에서 14세기 간에 있었든 계속된 지진으로 지금은 안렉산드리아의 앞 바다 속에 화려한 크레오파트라의 궁전과 함께 물 속에 잠겨 있다고 한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옛날 내가 어릴 때 읽든 요한복음 1장은 “말씀” 대신 원어대로 태초에 Logos가 있었다고 번역되어 있었는데 이 단어를 첫번 유대교에 도입한 유대인 희랍 철학자 Philos도 아렉산드리아인이다. 희랍인들과의 분쟁 때문에 주전 38년경 갈리귤라 황제를 만나러 로마에 간 바로 그 사람이다.

후일의 기록들에서는 그가 베드로를 만나러 로마에 간 일도 있다고 한다. 또 그의 아직도 남아 있는 방대한 저술이 말년에 기독교로 개종함을 나타낸다고 말 하기도 한다. 몇 편의 글을 읽어 보았지만 내가 읽고 이해하기 좀 어려운 글들이었다.

갈리귤라 황제의 할머니인 Antonia의 동방 재산 관리인인 Gaius Julius Alexandros는 그의 친 동생이고 성경에 나오는 말 많은 미인인 아그립바 2세의 동생인 버니게는 그의 집안의 Marcus Julius Alexandros와 결혼하였었다. 한 마디로 필로는 부유한 집안이었다.
필로의 아들은 일찍부터 로마의 군인이 되었고 후일 유대 총독과 네로 황제 때 애굽의 총독이 된 Tiberius Julius Alexandros이다.

마가의 전도 후에 아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우고 난 뒤 교인이 많아지게 되니 이방신을 섬기든 희랍인들이 그를 미워하였다. 그래서 그를 잡아서 그들 희랍-애굽신인 Serapis의 축제 때에 마가를 묶어서 길에 끌고 다녔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는 말 꼬리에 매여 말을 달리게 하여 돌과 바위에 부딪히면서 이틀 뒤에 죽었다 한다. 그는 온 몸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면서도 순교자의 반열에 서게 하여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지금은 그 신전은 없어졌지만 아직도 가장 높은 고지에 있든 그 지역은 남아 있다 한다.

나약하여 열심으로 주를 섬기지 못하였든 과거를 생각하며 그의 감사의 기도를 묵상해 본다.

애굽의 교회는 훌륭한 많은 교부들이 나왔다. Clemens, Origen, Athanasius등의 지도자들을 배출하였고 Menas, Cathrine, Peter등 순교자들과 함께 주후 284년에는 144,000명이 순교를 하였다는 기록을 보았다.

이 애굽의 교회를 Coptic Church라하고 로마교회와는 정치적이 이유로 갈라섰지만(?) 적어나 아직도 독립된 교회로 전 세계에 전도하고 있다. 콥딕 교회는 초대교회 때의 큰 이단이었든 Gnostic들과 싸운 교회이다. 내가 아는 애급에서 온 기독교인 의사에게 물어보니 자기도 콥틱교회 소속이라고 말하였다.

Coptic이란 교회를 말하기도 하지만 그리스 문자를 애굽 글로 사용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지금도 많은 콥딕 문자로 기록된 기독교 문서들이 애굽에서 발굴되고 있다.

불행하게도 바울을 통하여 서양으로 전달 된 교회의 기록은 우리가 잘 알지만 아프리카와 이란, 인도 등으로 전하여진 복음은 잘 모르고 또 알 수도 없는 것이 많은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