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당신 예수님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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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전이라고 기억된다. 날씨가 쌀쌀한 날이었다. NY에서 NJ의 Atlantic City로 가든 한 리무진이 NJ Turnpike (고속도로) 변에서 정차를 하고서 지나가든 차들에게 운전사가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차 타이어에 구멍이 나서 스페어 타이어로 갈려고 하였으나 잭이 없었다. 고속도로 변이라서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시간이 좀 지나갔다. 그런데 마침 허름한 차를 몰고 가든 중년의 남자가 차를 세우고 자기 연장을 꺼 내어서 차를 고쳐주었다. 막 떠나려는 그 사람에게 차 창을 열고 그 때까지 안에 있든 신사가 인사를 하였다. 얼마나 주면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잠간 도와 준 것을 가지고 무얼 그러느냐고 하면서 이 사람은 웃고 떠나려 하였다. 그 신사는 꼭 사례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 하였고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렇다면 우리 와이프가 꽃을 좋아하니 꽃이라도 한 송이 보내달라고 하면서 주소를 가르쳐 주었다. 다음날 꽃이 배달 되었고 감사의 글과 함께 봉투가 하나 있었는데 열어보니 아직도 갚아야 할 많은 돈이 남아 있든 자기 집의 은행 융자금이 깨끗이 갚아져 있었다. 그 차 안의 신사는 NY시 곳곳에 볼 수 있는 Trump 이름이 붙은 빌딩의 소유주로 미국의 가장 큰 부동산 재벌 중의 한 사람인 Donald Trump라는 사람이었다. Trump는 전국 곳곳에 수 많은 빌딩과 부동산을 갖고 있고 또 동부의 라스베가스라는 Atlantic City에도 거대한 카지노들과 호텔을 소유하고 있다. 정말 흐뭇한 이야기이다. 1954년이던가? 1955년이던가? 그해 겨울은 정말 추웠다. 우리들은 막 짓기 시작한 경북 대학의 가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산격동에 버스도 타지 않고 대부분은 걸어서 다녔다. 철로 밑으로 있든 굴다리를 지나 아직도 호랑이 고기를 팔고, 고래 고기를 팔고, 국화빵을 팔든 진흙탕의 칠성 시장을 지나고 방천을 따라 학교쪽으로 갔다. 쓸쓸하고 매말랏든 넓은 강바닥에는 여름철에 죄 타는 냄새를 맡아라, 이슬 같이 내리는 성령을 보아라라고 확성기로 떠들던 박태선 장로의 집회가 거기서 있었다. 그렇지만 그 겨울은 너무나 추웠다. 강바닥을 가로질러 막 건설한 콩크리트의 회색 빛 다리가 덩그런 이 걸려 있는 것도 스산했고, 다리 건너 집 한 채 없는 대학 길은 강바람 보다 더 한 황량함이 있었다. 그렇게 날씨가 심히 흐리고 춥든 어떤 날 아침, 이 다리를 건너서 학교쪽으로 가는데 가마니를 덮은 한 거지가 추위에 떨면서 다리 건너편 길바닥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수 많은 죽음을 보았든 6 25가 갓 지난 때라고 하여도 우리의 마음은 너무 가난하고 또 너무 무정하였다. 그 날 나는 고개를 돌리고 그냥 도망치듯, 옷 깃을 높이면서 그 옆을 지나간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난다. 그리고 평생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눈을 돌리며 도망치듯 지나온 죄책감에 나는 시달리고 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 들었을 때에 돌아 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적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 (마 25:31-46)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배약 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 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롬 1:30-32) 성경의 무정하다는 희랍어Astorgos는 자연스러운 사랑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을 보아 우리말 어의와 비슷한 것 같다. 우리 마음은 너무 매말라 있었다. 자비심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든 것 같았든 싸늘한 마음....자비란 필요한 사람에게 그것을 베푸는 마음이라 한다. 나는 사랑하여야 할 때에 사랑 할 줄도 모르고, 사랑을 하려고 할 때에는 사랑을 행할 용기도 없는 겁쟁이이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나의 일생을 살아 오고 있다. 나는 항상 상한 갈데 같았고 꺼져가는 등불 같았다... 그 분의 은혜가 없었다면 오늘 내가 무엇이 되어 있을까? 그렇지만 속으로는 내가 사랑하는 방법을,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고 자라지 못하여서 그런 것이지 나도 배웠더라면.....정말 정 많고 사랑 많은 사람이었으리라 위로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가슴 아프지만, 나는 정말 무정한 사람이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환자에 시달리고 난 뒤, 힘 빠져 있을 때에 자기 밖에 모르는 성질 고약한 환자를 만나면 신경질이 난다. 왜 우리 주위에는 적들만 있을까? 내가 상대하는 사람을 왜 항상 적으로만 생각하게 될까? 은행원이고, 백화점원이고 왜 모두가 나를 도와주려는 감사하여야 할 사람이기 보다 어쩌다 의심의 상대가 되어 있을까? 어디서든지….언제든지…..길 가다가 우연히, 우리 몸에 일부러 하듯이 부딪히는 사람 까지도 서로 마음을 열고 사랑의 상대자로 대할 방법은 없을까? 초대교회 교부들의 생각을 일부 기록한다. "당신들이 성전에서 행하는 것보다, 우리들은 길 가에서 더 많은 자비를 베푼다" Tertullian (c197) "가난한 자에게 베푸는 자비는 하나님에게 빌려 주는 것이다. 없는 자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제사요, 향기로운 제물이다" Cyprian (c. 250) "그리스도로 이 땅에서 네 소유물의 공동 소유주가 되게 하여라 그리하면 천국에서 그분은 너로 상속 받는 모든 것의 공동 소유주가 되게 하실 것이다." Cyprian 하루는 유대인 기독교인들의 방송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들은 빵을 굽고 있었다. 그리고서 빵을 축복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 빵을 먹게 되는 사람을 위한 축복이라는 것이다. 의자를 만들면서 의자를 축복하고, 밭에 가서 밭을 축복하고, 장사하는 물품을 축복하고....개를 축복하고, 소를 축복하고.... 축복이란 희랍어로 Eulogew 란다. Eu는 “좋게” logos 란 “말”을 한다라는 뜻이고, 또 다른 뜻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주위에 모든 것에 대하여 성 프란시스 같이, 사랑으로 축복하는 말을 하여 줄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모든, 나의 이웃, 또 주위에 향한 열린 마음의 축복하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나 아닌 모든 것을 축복하며 사는 인생은 얼마나 아름 다울까? 이런 인생을 사는 것이 쉬지않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도하면서 물건을 팔면서 “이것 본전도 안되게 밑지고 팝니다” 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교회에서 기도하면서 내 앞에 듣고 계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바쁘신 때인데도 만장하신 여러분…” 하는 식의 마음 가짐으로 하나님께 설교 하듯 행하는 기도 보다, 소리 없이 마음으로 행하는 이런 기도가 참 기도가 아닐까? 매일 마주치는 모든 것을 축복하는 중에 우리도 아브라함 같이, 롯 같이 하늘의 사자나, 주님을 만날지 누가 아는가? 오늘도, 나는 내 무정함을 달래기 위하여 사람을 대할 때마다, 듣든 말든, 혼자 중얼거린다. "혹시 당신 예수님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