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은 벌서 낙엽 속에 다 묻혀버렸다.
여름이 시작될 때에 집 사람이 교회 갈 때 입으라고 양복 한 벌을 Brooks
Brothers에서 사 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옷이나 치장에 별 관심이 없다. 한국에서 가져온
양복도 자주는 안 입어도 20여년을 입었다. 신 장에는 집 사람이 언제 구입하여 놓은 것인지
구두도 4-5켜래 가 있으나 그냥 쑥 꿰면 들어가는 고무창 구두 한 켤레만 6-7년을 매일
신고 있다. 그래서 다른 구두는 7-8년이 되어도 모두 새 구두다. 지금은 깎을 머리털도
반감하였지만, 결혼 하고는 이발도 집에서 하고 이발소에서 깎아 본 일이 없다.
그런데도 집 사람은 세일에서 샀다고 하면서 종종 내 옷을 손에 들고 들어 온다. 이런 좋은
옷들도 얼마가 지나면 안 입으니까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식사도 마찬 가지이다. 큰
아이가 집에서 아무리 스테이크를 잘 구워서 감자, 옥수수….등을 내어 놓아도 나는 밥을 같이
먹어야 한다. 밥 외에는 밥을 먹기 위한 반찬이라는 생각이 있어서 인 것 같다. 그러니 밥을
먹지 않으면 식사를 하지 않은 것이 된다. 헴버거나 피자도 나에겐 반찬이다.
같은 고정된 관념에 나는 옷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항상 있다. 옷장에는 내 표준으로 보면 과할
정도로 옷이 넘친다. 대학 다닐 때에는 물 드린 군복이나 구제품 양복을 입었었다. 그것도 단불
이었다. 항상 그 때를 생각하는 것 같다.
아버지 날은 어떻든 새 옷을 반 강제로 집 사람이 입혀서 교회를 갔다. 특히 더웠든 그날은
아사 같은 흰 양복지에 갈색 긴 줄무늬가 있는 새 양복은 정말 시원하였다. 무엇보다도 옛날
한국에서 동네 유지들이 입은 것을 본 것과 유사한 옷감이라서 기분이 좋은 주일날이었다. 교회에
도착하자 먼저 오신 우리 강 집사님이 “아이고 장로님 시원하시겠습니다. 어디서 사셨습니까? ”
한다.
다음 주에, 집사님은 우리 집 사람에게 200불을 쥐어 주면서 자기도 사 달라고 한다. 한
여름에 여름 양복을 파는 곳이 어디 있는가? 지금은 벌서 가을이나 겨울 옷을 판다고 하여도
알아 듣지를 못한다. 더군다나 Brooks Brothers에서 200불로서는….
다음 주일 동안 집 사람이 우리가 좀 보탤 생각을 하고 백화점 마다 다녀 보았지만 여름 옷들은
이미 없어진 지가 오래 되었다. 할 수 없이 내 옷을 깨끗이 다려서 옷걸이에 걸어서 교회에
갖고 갔다. 그리고 형편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잘 되었지 뭐, 색깔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아직 주머니 실밥도 안 땄네요”
물론 안주머니에 200불도 함께 있었다.
우리 강 집사님은 나와 나이가 같다. 강 집사님은 소아 마비로 오른 손과 양 하지가 마비된
지체 장애자이다. 10년 전, 우리가 교회를 함께 시작 할 때에 나에게 편지 한 장을 주었다.
왼 손으로 기록한 글씨가 고교 졸업반 여학생 보다 달필이다. 자기의 과거사를 기록하고 한국에서
온지 가 1년 남짓하여서 1년은 더 있어야 미국의 국가 보조금을 탈 수 있는데 지금은 누님
댁에 얹혀 있다고 한다. 누님 댁도 국가 원호 대상으로 자그만 한 방이 두개 인 아파트이다.
지금은 돌아 가셨지만, 자형이란 분도 뇌성마비 환자이다. 그래서 누님께 매달 100불씩 줄 수
있으면 얹혀 있기가 뜻 뜻 하겠다 한다. 그러니 누가 매월 100불식만 1년 동안 도와 주실
분이 있으면 소개 하여달란다.
편지를 읽고 누구에게 부탁할까 하며 돌아서는데 젊은 전도사님이 “장로님 어떤 분이 예수를
믿으시는 분도 아닌데 한 달에 100불씩 누구를 도와주고 싶다고 방금 연락이 왔습니다. 누구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까?” 한다.
??????.
그래서 기증자에게 강 집사님 주소를 주었다.
강 집사는 강원도에서 1935년 정월 달에 태어났다. 가난한 장애인이었으나 국민학교는 겨우
졸업하였다. 무직으로 몇 년을 지났다가 시골 장터의 콩쿨대회에 나갔는데 보고있든 약장수들에게
스카우트 되어서 그들을 위하여 장터에서 손님 모으는 가수로서 지나게 되었다. 자리가 잡히고
얼마 뒤에는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둘이 있게 되었다.
어느 날, 바쁘게 몇 주일 장돌림을 하고 하루는 집에 돌아오니 부인은 옛날, 같이 일하던
악사와 도망을 가버리고 아이들은 할아버지 댁에서 지나고 있었다. 평생에 유일하게 정 주었든
부인의 배신으로 낙담한 그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몇 번인가 자살을 기도 하였다.
마지막은 어떤 비오는 날 저녁에 청량리 철 둑에 목을 베고 누워 있다가 순찰 경찰에 붙잡혀서
정신과에 입원하였는데 여기서 폐 결핵으로 양쪽 폐가 그의 모두 파괴된 것을 발견하였다. 사실
죽으려고 악을 쓸 필요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병원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은 결핵은
완쾌되었으나 숨이 가쁘고 손 발이 여의치 않아서 크럿치를 집고 걷거나 휠췌어를 타고 다닌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그런데 강 집사님에게는 또 답답한 일이 생겼다.
“장로님 정부에서 법이 바뀌어서 한 6개월 더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만은…”
같은 때쯤, 이 잘 알지도 못하는 도와 주시든 분에게서 또 연락이 와서 1년을 더 도와
주겠단다.
정말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하는 두려움이 왔다.
이 사건은 나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였다. 나는 한국과 미국에서 26년을 넘게 공부 할 수
있는 축복을 하나님은 주셨지만 그 축복에 걸 맞는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 온 강 집사님이 만약 그런 축복을 받았었다면….. 지체 장애자의 몸으로
6년의 교육인데도 180센티의 키와 남자다운 얼굴 용모, 조리 있는 말씨, 정리되게 잘 쓰는
글씨 등을 미루어 나보다 훨씬 남을 위하여 큰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빚 진 자라든 말이 생각났다.
흡사 남의 축복을 가로챈 듯한 부끄러움 때문만은 아니지만 하루는 “장로님 안 입는 코트 있으면
....” 그날 교회에 입고 갔든 좋지 않은 코트지만 세탁 못하여서 미안하다며 주고 왔다.
그리고 빚을 조금은 갚은 듯, 건방진 자기 위로를 할 수 있었다. 그 후로도 그 분의 부탁을
거절 할 수가 없다.
지난 8월12일자 NY Times에Zell Klavinsky라는 분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
분은 암이나, AIDS등을 치료할 약을 발견 하기 위하여 고생하거나 인류를 위하여 일 할 수
있는 분이 신장 장애로 신장이 필요하다면 자기의 것을 주겠다고 말하였다. 자기는 못하지만 그런
분들은 수 백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가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문제는 Klavinsky는 최근에 이미 다른 쪽 신장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기증하였었다.
그러니 남은 다른 신장마저 기증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 조차도 생각하고 한 이야기이다.
Kravinsky씨는 가족의 전 재산인 1,500만 불을 현금과 부동산등으로 병원등에
기증하였었다. 정신과 의사인 그의 부인 Emily는 하도 답답하여 이혼 하겠다고 말한다. 실제
그는 미친 사람이거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다.
어머니 Reeda Klavinsky는 말한다. “남을 위하여 돈을 줄 수도 있고, 다른
도움들도 줄 수 가
있지만, 자신의 몸의 부분을 준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가족들을 위하여 몸의 기관을
준다는 것도 크다란 희생이지만 이해는 할 수가 있다. 그러나 Zell의 경우는 내가 이해는
한다고 하여도 나는 동의 할 수는 없다”
이 말에 대하여 “내 인생이 다른 사람의 인생 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고
Zell은 말한다. 또 그의 부모와 처가 묻는 “만약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의 신장이 필요하게
될 경우는 당신이 줄 신장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가상적인 질문에 대하여
그는 확률을 이야기하며 “나는 우리 아이들을 정말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의 인생이
다른 어떤 사람의 인생 보다도 더 중요하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고 한다.
지난 7월 22일에도 필라델피아의 알버트 아인슈타인 메디칼 센트에 찾아와서 그의 남은 신장을
알지도 못하는 불쌍한 흑인 여성을 위하여 기증하겠다고 의사와 다투고 있었다.
“누구도, 모든 사람이 살 집이 있을 때까지 별장을 가질 수 없고, 모든 사람이 다 차를 가질
때까지 두 대의 차를 가질 수 없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신장을 가질 때 까지 누구도 두개의
신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의 말이다.
“How much is too much” 기사 제목의 일부이다.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든 분은 말씀하신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