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 옷을 팔아 검을 사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장을 하고 있었고 또 베드로는 이 무기를 사용하여 사람을 공격하였다. (눅 22:36,38 요 18:10) 표현이 좀 이상 하지만 사실이다. 나중에 예수님도 제자들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무장하라고 명하셨다.

몇일 전부터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다. 이틀 전, 미국이 전쟁을 선포한 날 몇 시간을 TV 앞에서 되풀이 되풀이하는 전쟁 이야기들을 시청하면서 혼자 뜻 없이 그냥 흥분을 하고 있었다. 작년부터 전쟁에 다칠 어린이들과 여자들을 간혹 생각하면서 "전쟁은 없어야 한다"고 미국 친구들과 논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9-11 때의 일을 한편으로 기억하면 가슴이 아팠다. 우리 아이들의 똑똑한 친구들도 그기에서 그 젊음을 끝내었다. 무슨 불교적인 인과 관계인가?

전쟁의 보도를 보면서 2차전때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하든 날이 기억되고, 6 25때 집 떠나 미군들과 함께 전쟁터를 돌아다닌 것이 생각났다. 월남의 야전병원에서 그 많은 부상자들과 지났든 날들도 생각났다. 그런 경험들이 가슴속에서 뒤엉키면서, 이기든 지든 싸움 뒤에 오는 것은 허무함 뿐이라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아무리 물난리, 불난리, 싸움 구경이 인간들이 가장 좋아하는 3가지 구경이라고 하드라도 내 나이에 아무 생각도 없이 혼자 흥분하면서 TV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은 좀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오랜 동안 생각하고 있든 이 제목을 생각하였다. 왜 예수님은 검을 팔아 겉옷을 사라는 도전적인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님도 구약의 그 많은 이야기들 같이 싸움이나, 전쟁을 선호하시는 분이신가? 또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26:51)는 상반된 말씀도 하시지 않았는가?

중학교 때 예수를 믿지 않으나 성경을 잘 아는 친구가 내 오른편 뺨을 치고는 예수 믿으면 성경대로 살아야 할 것 아니냐 하면서 왼편 뺨도 또 치려고 하여서, 성경에 돌려대라고만 말씀하셨지 맞으라고는 안 하셨다고 하며 싸운 일이 생각난다. 때로 우리는 말씀대로 살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를 때도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누구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성경에 기록 된 글자 그대로 행하여야만 한다고 주장 할 수는 없다. 한 예로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인 돼지 고기, 오징어를 우리는 먹고, 피가 있는 스테이끄를 먹으며 혼방 된 옷감들로 된 옷들을 입는다. 안식일을 범 한자, 간음 한자 등은 죽이라고 하였는데도 우리는 이를 지키지 않는다. 예수님도 율법에 죽이기로 되어 있는 간음한 여인을 죽이지 아니하셨다. 예수님은 왜 문자적으로 율법을 지키시지 않으셨는가? 지금 우리는 금요일 저녁에 시작하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

물론 율법 시대와 은혜의 시대가 다르니까 그렇다고도 설명을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신약시대의 결정도 지키지 않는다. 한 예로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최소한 지킬 것을 명한 예루살렘 교회의 결의이다.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 피를 멀리 하라" (행 15:21)고 한 것이다. 이를 그대로 다 지키는 자는 극단적인 보수교인 중에도 없을 것이다.

택사스 지방에 가면 독사 뱀을 주물이면서 예배를 보는 한 기독교 분파가 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막 16:17-18)
이 말씀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다. 그 같이 하지 못하면 믿음이 없는 자이다. 그래서 독사가 가득한 광주리에 손을 넣는 연습을 한단다.

예수님의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란 말씀을 글자대로 믿는다면 누구나 자기 눈이 범죄 하였다고 빼어버리지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우리는 이것들을 글자 그대로 지키지 않는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가르쳐 주신 데로 율법이나 말이 아니라 그 말씀 뒤에 있는 하나님의 참 뜻을 더 중시하는 때문이다. 이것이 곧 율법의 완성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 5:17).

얼마 전 아프가니스탄은 망하기 직전에 타리반의 열성적인 신앙인 들로 혼돈에 빠져 있었다. 세계의 유산인 바미안의 50m짜리 석불을 폭파하는가 하면 문자 그대로 자기들의 경전을 지켜야 한다고 해석하고 가르치는 지도자들에 의하여 병적인 신앙인 들이 양산되고,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은 고생을 하며, 죽음이 넘쳐 나고 있었다. 신앙인은 누구나 열심히 신을 믿고 헌신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더 정열적으로 더 강요하는 지도자들의 목소리와 힘은 항상 크게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한국 신문에 열성적인 한 목사님이 가까이 있는 절의 부처 상을 도끼로 부셔 버렸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믿음의 열심이 넘치는 한 젊은이는 동리 어구의 장승을 부셔버렸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사실인지는 내가 본 일이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런 글을 볼 때마다 믿는 데로 행하지 못하는 꺼져 가는 등불 같은 내 믿음이 죄스럽게 생각되고 조금은 부끄러워지려고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는 바울 사도가 아테네에 갔을 때에 우상이 온 시가에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에 분하여"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들을 변화시키려고 하였지 그들의 우상을 자신이 때려부수려 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테네에 가도 감탄하고 볼만한 구경거리들도 없어졌을 것이다. 바울은 그 우상들이 돌이 아니고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고 불상 하게 생각하였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세상을 이처름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되라 하신다. 그것은 기독교도들만이 아닌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신 이가 생명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고 사랑 보다 더 큰 신앙이 없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다.

나무나 돌로 만든 것을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만 그것이 우상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창조한 것으로서 나무는 나무, 돌은 돌이지 사람이 만든 것 속에 신이 있을 수 없다(행 19:26)는 신앙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날 때 우리는 전쟁의 뜻을 조금은 깨달을 수 있을것 같다. 역사상 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전쟁마다, 싸움마다, 죽은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겉옷을 팔아 사야 할 검의 참 뜻은 무엇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