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기도 할 때 색갈은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데....?|♤이상국의 신앙이야기
이 상 국 |  | 04.04.24 10:52 

연말에 둘째가 또 다른 여자 친구를 다리고 왔다.

둘째는 소위 386세대에 속하는 나이가 38인데도 아직 결혼을 해 주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1미터 82센티 키에 72킬로의 체구이다. 학교도 아이비 수쿨의 대학원 까지 나왔고 직업도 건축 설계사로 만하탄에 직장을 갖고 있다. 제 아파트도 있다. 인물도 셋 중에서는 제일 멀쩡하게 생겼다.

대학 졸업한 뒤에, 88년도 한국에 갔을 때는 사촌들과 다방에 앉아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탈랜트인지 뭔지를 하란다 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전화로 물어 온 일도 있다.

교회도 출장을 가지 않으면 빠지지 않고 출석을 한다. 예수 믿는 여자를 기다리는 듯이 말하는 것을 보아서는 신앙도 있는 듯 하다.

오늘, 함께 온 처녀는 유명한 대학원을 나온 건축사란다. 키도 큼직하고 체격도 늘씬하다. 그리고 그렇게 순해 보인다. 교회도 성공회에 속한다고 한다. 그리고 남미 영령 가이아나가 고향인 아가씨이다. 그런데.......



일주일 전, 둘째가 싱가폴과 한국으로 출장 가기 전에, 새벽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어머니가 받을 쇼크를 걱정하여서(?) 전화로 설적 예방 주사를 놓고 갔었는데도 막상 만나고 보니 좀 놀랍다.

장점들만 볼려고 노력하는 엄마이지만 이건 좀 힘이 드는 눈치이다.
“하필.......”

말하자면 너무 피부 색깔이 진하다는 뜻인 듯 하다. 그렇지만, 사람은 모두 같으며 다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라고 가르치든 입으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

7-8년 전에는 법대를 나온 막네 아이가 노랑 머리에 파란 눈의 남자 친구를 다리고 왔을 때도 놀랐었다. 그 때는 너무 색깔이 연하여서 탈 이었는데......

그런데 지금 그들은 두 손자를 우리에게 안겨 주었다. 또 사랑하는 두 사람이 손 잡고 열심히 교회를 가는 것을 보는 것은 즐겁다. 이젠 집 사람도 사위를 아주 좋아하고 자랑스러워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직업은 의사이지만 손 재주가 좋아서 우리 집의 목공 일이나 전기, 상하수도 문제가 있으면 말짱하게 고쳐 놓는 것이 건축과 출신인 둘째 보다도 더 솜씨가 좋아서 이다. 한번은 뒷편 Deck을 고치는데 이웃 유대인이 와서 "어디서 목수를 구했는지 솜씨가 아주 좋다”고 감탄을 한 일도 있다. 하긴 예수님과 같은 직업을 가졌다면 누가 미워 하겠는가?

그런데 오늘 온 손님은 나도 마음 속으로 혼자 생각을 해 보니 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만약 저들이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아이들을 낳고.....아이들이 자라면서 겪을 인종적인 편견과 싸울 둘째의 앞 날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저렇게도 행복한 듯 하니 할 말이 없다. 오히려 말 없는 집 사람을 위로하고 싶다.

그래서 침실로 들어와서 혼자 있는 집 사람에게 불쑥 한다는 소리가 “당신이 기도 할 때 색깔은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없는데.....?” 해 놓고 나니 좀 미안하다.

어디 기도는 그 사람 만의 책임이겠는가?

우리의 온전한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 집 사람의 잘 못은 아닌 듯 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이겠지......


그래서 “야!! 우리 같은 집안은 흔하지는 않을 거야. 손주들이 함께 모이면 이건 유엔이 되겠지 ....그지?” 하면서 너스레를 떨어 본다.

“정말 결혼을 할 사이인가?”

다행히 (?) 우리 큰 얘는 한국 사람과 결혼을 하였다.처가의 영향으로 함경도 악센트는 섞였지만 한국말(?)을 하려고 지극히 노력하는 처와 그 사이에 두 아이를 갖고 있다. 어떤 여자라도... 한국인이라면....아니 동양 사람이기라도 한다면...하다가는 깜짝 놀란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을 생각에 포함 시키지 않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인도 하실 줄 믿지만,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간혹, 나의 바라는 것이 최선이고 하나님의 뜻일 것이라고 생각 할 때가 자주 있다. 그래서 “설마 결혼은 안하겠지”라고 내 욕심을 하나님 뜻으로 살짝 화장을 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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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인도 하시기 위하여서 자주 고향을 떠나라고 이야기한다. 그런 말씀 덕으로 미국에 처음 와서 그들의 풍요에 놀라고 여기가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일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자주 있었다.

허나님은 선택된 사람들을 끝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간을 따지지 않고 마침네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실제 아브라함을 풍요한 바벨론의 곡창 지대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은 후일 흉년으로 옮겨 간 다른 곡창 지대인 애굽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시 불러내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이 그들의 후손들이 옮겨가는 복 주어질 땅으로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로 “저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들어 갈 때까지 우리를 최선의 방법으로 지키시고 인도 하실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또 찝찝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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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젖과 꿀”은 무엇인가? 물질적인 풍요로움, 내 인간의 욕심과 꿈의 내용인가?

청동기시대부터 몇 천년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의 기후는 큰 변화가 없었다. 지금의 메마른 석회석과 사암의 땅인 가나안 땅은 그 때도 마찬 가지로 터 잡기에 그렇게 좋은 지역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서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말씀 하셨는가?

타락한 우리 인간의 역사는 잃어버린 낙원을 꿈꾸며 살아가는 생활이다. 그래서 가나안은 구약에서는 에덴의 모형이었다.

그런 꿈 속에 살아 온, 우리 인류의 역사는 성경상 하나님이 멀리한 가인의 역사와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아벨의 역사의 기록이 된다. 가인의 역사는 농사를 짓는 직업이고 아벨의 역사는 목축을 하는 직업이다. 또 가인의 제사는 안 받아드렸지만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이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농사를 짓는 직업은 물이 많고 기후가 좋으며 땅이 기름진 강 주변으로 연결되고 있다. 바벨론의 하구와 애굽의 하구는 가장 아름다운 농경 지역이었다. 인간적으로 보면 축복의 땅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는 하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 땅을 떠나라고 하셨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집을 짓고 동리를 이루었다. 추수가 이루어지면 창고를 짓고 곡식을 쌓아두고 “내 영혼아….먹고, 즐기자”로 생활이 이어졌다. 그들은 집단을 이루고 도시를 만들며 그들의 힘을 확인 할 수 있었고 두려움은 없어져 갔다. 그들은 여유 속에서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가인의 문화 속에서 그들이 마지막으로 생각할 수 있었든 것은 바벨의 탑이었다. 도시의 죄악은 스스로의 힘을 확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떠나라고 하신다. 내 가족을 의지하는 믿음에서 , 내 동족을 의지하는 믿음, 내 단체의 의지심과 그 힘에서 떠나라고 하셨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신다. 그곳은 물질적인 풍요는 없을지 모르나 우유와 들판의 꿀은 풍성한 곳이었다.

가나안으로 나온 이스라엘인들은 아벨의 직업을 주로 가졌었고 농사를 지어도 메마른 땅이라서 큰 부락을 이루지도 못하였다. 하늘의 비만 바라고 기다리는 삶이었다. 후 일에 3년의 대 감음을 당한 이스라엘에서 행한 선지 엘리야의 강우의 기도는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어느 세대나, 목축을 하는 사람들은 짐승들을 몰고 외롭게 들판을 헤매고 다니었다. 밤이면 들판에서 잠도 깊이 들지 못하고 추위와 더위, 도둑과 맹수들의 공격을 항상 대비하는 경성하는 생활이었다.
별들이 흐르는 들판에서 외로운 양치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외로움과 두려움 중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겸손한 고백과 간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가진 것이 없고, 자신이 없었고, 가까운 인간 끼리 의 뭉쳐진 힘을 생각하는 교만도 없었다. 인간의 눈으로서는 그들은 항상 실패자 같이 보이는 생활이었다.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에서 말씀하신 선한 목자의 설교는 이를 염두에 두신 말씀이 아니겠는가?.

고향을 떠나라는 말씀은 바로 가인의 생활에서 떠나 이 아벨의 생활로 들어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 할 수 밖에 없는 생활, 그 땅이,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그런데 왜 우리들의 가치관은 "가인의 땅"에 올무가 채여 있는가?

우리가 우리의 욕심으로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하고 기도 할 동안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인도 하심을 생각하게 된다.

풍요로운 삶 속에서도 내 가진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나의 자녀, 나의 생명 조차도 당신의 것입니다 고 고백하며, 홀로 절대자에게 꿇어 엎드릴 수 있는 마음을 가질 때에만 그 곳이 가나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참된 사랑을 하기 위하여서, 참된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기 위하여서, 나는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의 관습과 편견에서 떠나야 할 힘을 주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