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퓨터

“그 날 우리 아버지가 나를 삼촌 집에 맡기고 저녁에 다리려 온다고 하고서는 오시지 않았다. 가난하였든 우리 아버지는 이틀 뒤, 내 동생을 어머니가 출산한 뒤에야 나를 다리러 왔다. 나는 4살이었다. 나는 이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거짓말의 상처로 인하여 자란 뒤에도 오랜 동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갖기가 힘들었다.”

이 말을 한 내 친구 멜빈 브라운은 나이 일흔의 은퇴한 유대인 외과의사이다. 우리 나라에도 군사부 일체라는 말이 있지만 그에게는 아버지와 하나님은 같은 신뢰의 상대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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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대는 어릴 때 만화책이 귀했다. 물론 TV는 없었다. 그러나 70년대를 유,소년기에 보낸 세대들은 TV를 마주하여 자랐다. 이 사람들은 우리 세대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인만화를 좋아하고 제 빠르게 콤퓨터, 게임기 등을 생활의 일부분으로 만들었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멧세이지를 네모꼴의 화면으로부터 받아드린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비 인간적이고, 비 사회적인 네모꼴도 그들이 아무 저항감 없이 받아드리게 되는 바탕은 그 속에 빠져서 자란 때문이라 생각된다.

TV의 영향은 2세부터 12세 간의 어린 아이들에게 단기적인 것 뿐만 아니고 15년 이상 장기적으로 관찰한 결과도 어릴 때 폭력적인 영상들에 노출된 어린이들은 자란 후에도 폭력적인 행위가 높았다. 장성한 후, 폭력적인 영상에 노출 되지 않았든 사람들 보다 그들 배우자에게 2배 정도의 폭력행사가 있었고 교통 규칙 위반 보고도 그의 2배 가까이 높았다. (Rowel Huesman et al, 2003, Developmental Psychology 39, pp 200-220)

TV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스타들이다. 그들은 선한 역도 하지만 악역도 행한다. 그래서 네모난 통을 통하여 알게 된 그들이 좋아하는 정치가나 사회 지도자가 섹스 스켄달이 있거나 범죄 행위가 있어도 그들은 관대하다. 그들은 같은 TV에 등장하는 스타이기 때문이다.  같은 스타가 때로는 악역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TV는 함께 볼 수 있다. 그러나 콤퓨터는 혼자서 하는 것이다. 같이 한다는 것은 바깥 세상에서 부모와 같이 있으면서 가상 세계로 진입함으로 비교적 안정성을 가진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의 TV를 볼 때는 어른 들이 같이 있어야만 그 스트레스를 주릴 수 있다. 그것이 가상이며 실제가 아니란 것을 느끼게 하는 점이 중요하다. 또 어른들이 생각하는 폭력적인 영화 보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선한(?) 입장에서 행하는 폭력이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크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나 램보 같은 경우이다.

같은 입장에서 콤퓨터나 TV를 어린이의 개인적인 침실이나 혼자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응접실이나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두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콤퓨터의 해독은 어떤 것이 있는가? 아직 믿을 만한 장기적인 관찰 보고는 없다. 그렇지만 콤퓨터는 TV와 다르게 실 사회와 단절되며 완전히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콤퓨터의 장단점을 생각하면 양날을 가진 칼과 같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많은 장점들이 단점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특별히 일부 사람들에게는 깨어 있는 생활의 1/4서 1/2 이상의 시간을 콤퓨터로 소모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마약이나, 음식이나, 노름이나….등등에 중독 된 것과 같이 중독증상이다.

콤퓨터와 인터넷으로 이루어지는 “가상 공간”과 실 생활에서 얼굴과 얼굴을 대면함으로 이루어지는 “인격적 관계”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실 생활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열려 있는 관계로, 보고, 듣고, 만지고, 맛을 보고 그리고 냄새를 맡고 그리고 감각 기관 이상의 것을 알게 하는 “느낌”으로 판단 되어진다. 그러나 가상 공간은 그 부분이 결여되어 있다. 여기서 콤퓨터의 좋은 면은 두고 나쁠 수 있는 면과 그 결과를 간단히 생각하여 보려고 한다.

가상 공간의 특징은 다음 같은 것으로 생각하여 볼 수 있다.

1) 너는 나를 모른다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대부분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를 제하고는 그 익명성에 있다. 어른들이 계시고 자기가 자란 고향에서는 취할 수 없는 태도도 대도시 속에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는 생각과 생활 태도가 다를 수 있다. 그 같이 내 속에서 절제하고 조심하는 자제력을 잃어버린다. 특별히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느낌은 어디든지 가고 싶은 곳을 가게 만든다. 공격적인 감정의 표출도 그 행위에 대한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실제 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그 짓은 참 내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정신적인 이중성을 갖게 된다.

2) 너는 나를 보지 못한다
일단 현실 세계에서 스크린 저쪽의 가상 공간에 들어가는 순간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한다. 남들이 보고 있으면 감히 가지 못할 곳을 더나 들고 거기서의 연결은 상대방의 표정이나 감정이나 한숨 소리나 아무런 것에도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 그래서 주위에 대하여 무관심하여 진다. 메일이나, 아이디가 따라다니는 곳에 간다고 하여도 내 말이나 글에 책임감을 가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바깥 세계 같이 노인들에게나 병약한 사람 여자들에게 자리를 양보 할 필요도 없다. 내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외면하는 비 사회적인 태도를 하게 된다.

3) 나중에 봅시다
같은 시간에 상대방과 대화를 꼭 할 필요가 없다. 같이 앉아서 대화를 한다면 직시 응답을 하여야 하지만, 가상 세계에서는 수분, 수시간, 몇일, 몇 달을 사이에 두고서도 가능하다. 때로 성이 나거나 입장 곤란하면 피하고 있다가 오랜 시간 뒤에 다시 시작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감정적인 “hit and run”도 가능하다. 실 사회에서는 꼭 필요한 책임져야 하는 일들을 가상 공간에서는 할 필요가 없다. 피해 버리고 꺼 버리면 된다.

4) 모든 것은 내 머리 속에 있다.
대면한 대화가 아닌 문자 멧세이지는 때로 글을 읽을 동안에 우리 머리 속에서 목소리로 바꾸어 진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 표정, 버디 렝귀지, 시각적인 모습까지도 부족한 면을 상상으로 메워서 나타내어 보여 줄 수 있다. 거기다가 내 소망과 기대로 채색 할 수 있다.
가상공간에서 자주 만나는 상대와 실 생활에서 지극히 가까운 사이에만 사용하든 사적인 대화로도 발전 할 수 있고 그런 상황을 꾸밀 수 있다. 그래서 상대가 실제 그러한 존재인지 내가 원하는 상상의 존재인지를 혼돈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실 생활에도 어느 정도의 이런 혼돈은 있지만 언어의 절제나 감정의 절제가 없는 상태에서는 훨씬 심각할 수 밖에 없다.
심하면 실제 생활은 꿈이 되고 가상의 공간은 실제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가상의 공간은 무대이고 우리는 단지 배우가 된다. 타인의 글을 읽는 순간에 내 목소리가 상대방의 목소리로 되고 동시에 나 자신의 목소리가 되어 버린다.

5) 이건 단지 게임일 뿐이다.
실제 세계에서 책임지고 지켜야 할 모든 것이 게임이고 배우 역이 되어져서 무책임한 마음의 상태로 되어진다. 그것은 온 라인에서 픽션이 오프라인에서 실제가 되고 실사회에서의 실제가 온 라인 같이 게임으로 여겨지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모든 생활이 게임이면, 왜 내가 책임을 져야 할까? 단지 콤퓨터 같이 끄고 난 후, 떠나서 매일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인데......비데오 게임 같이 친구를 향해 총을 쏠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 할지도 모른다. 그기 보태어져 비가시성과 익명성은 분열적인 환상에서 비 인격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착각 할 수도 있다. 이런 판단에서는 정치도 역사성과 현실성으로 판단하지 않고 단지 게임 같이 이기면 되고 진다고 하여도 그만인 것이다.

6) 우리는 동등하다.
마주 대하여서는 허락되지 않거나 처벌 받을 걱정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곳인 인터넷으로는 욕을 할 수도 있고 격정적인 말을 동원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권위에 대한 의식이 없어진다. 누구나 온 라인에서는 동등하다.
담배의 해독은 한번으로 폐암까지 되는 것이 아니다. 계속 행할 때에 점점 증가하여 해독이 나타난다. 상대방의 나이나, 지식이나, 권위나, 재산이나 관계 없이 대등하다는 버릇은 선생이나, 부모나, 대통령이나, 목사님이나 누구를 상대 할 때에도 조롱 섞인 말이나 행동등이 무심 중에 나타날 수 있다.

7) 우리는 특별한 하나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은어와 해학적인 문법은 이해하고 사용하는 그들만이 특별한 하나임을 확인 시킨다. 그래서 실제적인 어른들과 스승과의 대화에서 보다 그들의 말로 얻은 정보와 지식에 더 큰 중심을 둔다. 그들의 언어로 편집되지 아니한 모든 것은 가치가 떨어진다. 그래서 실 사회와의 분리가 이루어진다. 그들은 이단 종교 집단 같은 동지감으로 뭉칠 수도 있음으로 대단한 힘을 발휘 할 수 있다.




생각하여 보자. 어떤 여인이 실 사회에서는 할 수 없는 자신의 모든 문제들을 인터넷의 사회에서 모르는 상대에게 호소하였다. 그리고서는 억제하지 않고 표현한 “이게 실제 나다” 라고 생각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술이 취하여서 온갖 주정을 다한 사람이 “내가 취한 상태에서 한 말이 참된 나이다.” 라고 하는 것과 같다.

양파 같이 껍질을 까고 난 것이 참된 내가 될 수가 없다. 한 겹식 껍질을 까 들어가면 결국은 양파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렇지만 참된 나는 교육과 신앙과 도덕 등으로 다듬어진 내가 참된 나이지 않을까?
네모꼴 안의 세계는 열려 있는 바깥 세상이 아니다. 그렇지만 콤퓨터를 사용하는 속에서도 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은 계속 되어진다는 확인이 필요하다.

신앙적인 해답은 우리가 생각하여 볼 숙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