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아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 4:5, 참고 눅 1:17)

이는 예수님 앞에 나타날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이다. 그 많은 선지자 중에 왜 하필 엘리야냐? 그것이 내가 옛날에 갖든 의문이었다. 또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이 사상은 오해 할 수 있는 구절이었다. 간 사람이 다시 온다는 것은 흡사 힌두교나 불교의 윤회 사상과 같은 인상을 준다. 기독교는 창조에서 심판까지의 직선적인 것이지 불교의 윤회관 같이 둥근 것이 아니지 않는가?

한편 주전 3세기경에 다메색 (Damascus)에 불교가 들어 와 있었고 이들의 사상이 엣세네 (Essene)에게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는 "예수전'의 저자 르낭의 글을 본 일이 있다. (엣세네는 바리세와 사두게와 함께 있었든 유대교의 한 파로 이에 대하여는 아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철학자 Phillo의 글과 유대인 사학자 Josephus의 글에 기록이 있고 최근에는 사해성경(Dead sea Scroll)과 연관된 사람들이 이들이라고 보고 있다. 우리 성경 인물에는 세례 요한이 엣세네가 아니었던가 짐작한다.) 어떻든 엘리야가 온다는 것이 불교의 영향이었을까?

지금도 유대인들의 유월절 가정 예식인 Seder 때 각기 Matza (무교병), Maror (쓴 나물), Charoset (a nut와 사과를 섞은 것)등과 함께 4잔의 포도주를 준비하게 되는 데 이때에 별도로 엘리야의 잔이라는 것을 준비한다. 동시에 Seder 때 앞문을 반쯤 열어둔다. 그것은 언제라도 엘리야의 참석을 환영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이세벨 왕후 때의 위대한 선지자로 죽지 않고 불 병거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였다. (왕하 2:1-15)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도 엘리야의 돌아 올 것을 기다리고 있고 또 그 때를 메시야가 다스리는 시대와 동의어로 보고 있다.

위경(僞經)인 "니고데모의 복음서"에도 다음 같은 기록이 있다. 이것은 아리마데 요셉이 가야바와 안나스 그리고 니고데모 앞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일을 증언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요셉이 대답하여 말하되 당신들에게 안식 전날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진실로 나는 연금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 밤중에 서서 기도를 하는 중에 온 집이 네명의 천사에게 둘러싸이고, 햇빛같이 빛나는 예수님을 뵙게 되어 두려움으로 땅 바닥에 엎드려졌다. 주님은 손을 뻗어 나를 잡으시어 일어나게 하셨고......................주님은 나를 닦아주시고, 입을 맞추시며, 두려워 말라 요셉아, 그리고 처다 보아라, 나다, 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를 처다 보고서 랍오니 엘리야여! (Rabboni Elias)하였다. 주님은 나에게 대답하시기를 나는 엘리야가 아니고 (너희들이) 땅에 묻었든 나사렛의 예수다." (6장 19-25절)
이 기록을 보아도 예수님을 따르든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의 부활 보다 엘리야가 다시 온다는 유대사상이 깊었든 것을 알 수 있다.


엘리야의 이야기 중 엘리야의 말 데로 하나님을 향한 그 특심한 열심,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섬기는 선지자들과의 대결, 불 병거와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는 장면의 가슴 떨리는 장면을 읽기를 좋아한다.


장애인 교회를 시작한 지도 6-7년이 된 듯 하다. 처음에 멋모르고 교회를 덥석 시작한 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은 힘 빠져 떠나간 교인들과 지원자들로 교회 자리가 많이 비었다. 그런 중 년 전 11월1일은 우리들의 결혼 40주년이었다. 지난날들을 뒤 도라 보면서 아무런 일도 하나 한 것이 없는 인생이 갑자기 답답하게 느껴졌다. 계속 이 일을 하여야하는지 조차도 확신이 없어졌다.

기도 중에 목소리가 들린다든지, 무엇이 보인다든지, 어떤 단체에서 표창장이라도 준다든지, 누가 돈 보따리라도 들고 와서 탁 던져 주면서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동해서 드립니다" 라고 한다면 "아 하나님이 응답하시는구나" 하고 자신이 붙을 일이 아닌가? 많은 간증하는 사람들은 잘도 이런 일들을 가지던데.....

11월 첫 주 예배 사회를 보면서 예배 순서에 들어 있는 두 개의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오묘한 응답의 표시에 우리 둘은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40주년 Anniversary를 아무도 교회에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목사님도..., 두 장의 찬송가는 하나는 내가 평소에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였다.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했네....(98장)" 이었고, 설교 후 두 번째 찬송은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88장)"란 찬송이었다. 이 찬송은 결혼 후 첫 번 시골, 내가 자란 교회를 방문하였을 때, 우리가 중창을 하였든 찬송이었다. 6년 이상 교회에서 한번도 불러 본 일이 없든 찬송가를 이날 불렀다. 그날 속으로 울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은 왜 하필 이런 식으로 결혼 기념일을 축하하시고 응답하시지....!"

왕상 19장에 엘리야는 광야 로뎀 나무 아래서 낙담과 불안 속에서 죽기를 구하려고 있다가 천사의 말을 듣고 호렙산에 이르러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있다.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데...(왕상 19: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