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밥을 입에 물면 가슴이 매인다.|♤이상국의 신앙이야기
이상국 |  | 04.05.13 03:23 
마침내 “지극히 아름다운 오월”이 왔다.

다른 해보다 별나게 많든 눈들의 겨울과, 찬 비들로 채워졌든 “잔인한 4월”은 지나갔다. 손주들의 고함 소리가 들리는 뒷마당의 나무들은 연 초록의 부드러운 잎들이 가지마다 덮였다.

5월이 오면 내가 자라든 시골 교회에서는 야외 예배를 갔다. 야외예배는 보통 금호강이나 그 지류의 강변 사장으로 정해 저 있었다. 강변에 심은 포푸라들은 붉은 색을 띈 연한 초록의 잎들로 덮이고 끝없이 길게 심어진 귀리들은 보리나 밀보다 연한 색깔의 잎과 연약한 줄기들을 바람 결에 소녀들의 머리칼 같이 나부끼고 있었다.

건초로 사용하기 위하여 키우는 크로바과에 속하는 “벳지”들은 말벌들이 웅웅 거리는 보라 빛 꽃들로 덮이고 그런 모래밭 사이 사이에 우리들은 “소똥구리”들을 찾으며 뛰어 다녔다. 5월의 햇빛 아래서는 모두가 빛나고 향기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야외 예배를 위하여 어머님은 항상 맛 있는 김밥을 준비하셨고 우리들은 이 별미를 이웃들과 즐겁게 나누어 먹었다. 김밥을 입에 물고 모래 위에 누우면, 그 때는 시간은 느렸고 하늘의 흰 구름은 너무 아득하여서 빛나는 햇빛과 반짝이는 나무 잎들을 따라 졸음이 덮쳐왔다. 그런 초 여름은 아무런 걱정도 슬픔도 없는 날들이었다. 그렇게 어린 날의 김밥은 내 입에 익어 갔다.



뒷마당의 손주들을 아이들 아버지가 불러서 저녁을 먹인다. 큰 손녀는 식욕이 왕성하고 아무것이나 잘 먹는다. 그런데 3살이 겨우 된 손자 놈은 항상 밥 때면 칭얼대고 밥투정을 한다. 겨우 달래서 “ I want 도디 (고기) and 물 밥” 하는 소리를 하게 하고 물에 만 밥과 장조림 고기로 식사를 하게한다.

저녁을 먹이면서 에비가 한다는 소리가 “나중 너도 너 같은 아들을 가져라”고 축복을 한다. 그 말은 내가 항상 밥 투정하든 어릴 때의 제 에비에게 하든 말이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도 같은 어려움을 어머님께 드렸든 기억이 있다. 그러나 어머님은 내가 아들에게 준 그런 축복을(?) 하시든 것을 들은 일이 없다.

6 25가 나고, 나는 2년 가까이를 미군부대를 따라 다니다가 복학할 기회를 놓쳤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영남학교에 교장으로 계시든 고모부님 덕으로 영고 2학년에 편입을 하였다. 친구를 만들기도 힘든 나이였다. 대구에 하숙할 형편도 아니고, 매일 시간을 지키기를 거부하는 기차 편으로 통학을 하였다.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6시면 집을 나가야 하였다. 어머님은 5시 전에 일어나셔서 점심도 먹지 않으려 하는 나를 위하여 매일 김밥을 싸 주셨다. 점심 시간이면, 나는 영남학교 옆 화장터 가까운 보리 밭둑에 혼자 앉아서 이 점심을 생각 없이 날마다 먹었다. 그리고 어머님은 내가 대학에 들어 가고 난 뒤에 갑자기 뇌출혈로 돌아 가셨다.

지금도 그렇지만, 오랜 동안 나는 김밥을 먹기가 싫어졌다. 그리고 왜 그런지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제 나이 들고 나 같은 아들과, 나 같은 손자를 보면서, 지금은, 나는 김밥을 입에 물면 가슴이 매인다.

5월 9일은 어머니 날이다. 그리고 5월은 가정의 달이다.

******************************************************************************

사람이 자란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지난 날이, 그래서 그 때 보이지 않든 것이 지금은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내가 자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 아이의 때를 못 벗어난 사람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그래서 지능이 어린 아이의 나이에 정지하여 버린 뇌성마비 환자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떠나서) 죽은 행실을 회개 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 지니라 “ (히 6:1-2)

(회개와 신앙과 정결과 안수와 부활과 영생 등의 기초적인 교리만 되풀이 하지 말자. 이런 것들은 다 기초적인 가르침이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기초적인 가르침을 뒤에 두고 완전한 성숙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자)

우리가 신앙적으로 자라지 못하고 초보적인 것에 얽매여 있으면 집을 짓기 위한 터만 닦는 결과를 갖고 온다. 우리는 모두 집을 짓는 자이다. 터를 닦는 것은 집을 짓기 위하여서 한다. 터만 계속 닦으면 우리가 건축하여야만 할 집을 언제 지을 것인가 생각하여 볼 문제이다.

빌 코스비의 ”Fatherhood”란 책에서 본 이야기이다.
어린이들은 구체적으로 하나 하나 이야기하여 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샤워실에 들어가기 전에 옷을 벗고 들어가라. 들어가면 샤워 밑에 서서 물을 열어라. 그리고는 물을 머리와 온 몸에 적셔라. 그런 후에 비누칠을 하고 물로 다시 씻으라. 샤워를 마치면 물을 잠그고, 타월로 몸의 물을 고루고루 닦은 후에….….” 유모아로 말하는 아들 목욕시키는 장면이다.

어린 아이들이나 성장하지 못한 사람이나, 사회에서는 그 같이 기초적인 것만 가르치고 인도하여야 한다. 나는 간혹 나의 신앙 생활도 도리켜 보면서, 빌 코스비의 이야기 같이 우리들의 믿음도 하나 하나 외우는 단계에 매여 있지는 않은가? 생각 해 본다.

가만히 히브리서 저자가 말한 기초적인 교리를 따지고 보면 6가지 모두가 나만을 중심한 이야기들이다.

장성한 믿음이란 나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뻗어 나가는 믿음의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원숙하여져 가며 여유가 넘치는 할머니 같이 그런 원숙한 믿음을 가질 수는 없을가?

넥타이나, 금이나, 은이나 모든 것이 세로운 것일 필요는 없다, 오래 된 그림 같이, 부드럽고 천천히 변해가는 아름다운 골목길 같이 그렇게 우리의 믿음도 익어가야 한다. 기초적인 계율에만 목 매이지 말자. 예수님의 책망은 이런 교조주의 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장성한 사람으로 성숙하여 갈가?

******************************************************************************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 되라” (고전 11장 1절)

바울이 하신 이 말씀은 내 믿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말씀으로 항상 생각하는 말씀이다. 나는 이런 믿음을 갖고 우리 집 사람 앞에서, 그리고 자녀들 앞에서 부끄럼 없이 바울 같이 말할 수 있기를 소원하였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그런 아버지를 보고 본 받으면서 잘아가기를 바라면서 살아왔다.


"인간의 생명을 깊이 탐구해 들어가면 결국 인간들은 자기의 아버지를 탐색하고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육신을 준 아버지 혹은 어렸을 때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 정도가 아니라 ‘나에게 남겨진 아버지의 이메이지’를 우리는 암암리에 탐색하고 있다. 아버지의 힘과 지혜와 사랑과 신앙등이 사실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뿌리인 것이다” (Thomas Wolfe)



먼저 자란 사람이 ‘그리스도를 본 받고, 바울을 본 받고 그리고 나를 본 받아 달라’ 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에 대한 내가 지켜야 할 의무이다.

가장 기초적인 믿음으로 나를 구원 하였다면, 그 후에는 나에게 맡겨진 가정, 교회, 사회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보여 줄 책임이 있다.

내 생활이 나를 가장 가까운 곳애서 지켜 볼 수 있는 자녀와 가족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항상 기억하여야 할것 같다. 바람 피우는 아버지를 둔 자녀들은 그 아버지를 미워 하면서도 자라서 같은 모습이 되는 것을 흔히 본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는 모습으로 전해진다. 믿음도 마찬 가지이다. 신앙을 강조하기 보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를 보여 주어야 한다. 특히 가까운 이웃들인 ...자녀 가족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