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미주 이민 100주년|♤이상국의 신앙이야기
이 상 국 |  | 04.04.24 10:59 

1. 하와이 이민의 시작
몇 년 전이다. 병원의 귀 전문의인 한 유대인 의사가 젊은 여자 환자를 치료하면서 한 말이 생각난다. 이 환자는 다이빙을 하다가 고막이 상한 환자였다. "누가 이 병에 세계 제일의 권위자인지 아느냐"고 말하면서 그 사람은 한국 사람인데 닥터 세미 리라고 들어 본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또 닥터 리는 올림픽 다이빙 금 매달을 수상자라고 말하였다. 어찌 모르겠는가...그 날 전화로 이 귀 전문의가 칼리포니아의 그 분께 자문을 구하는 것을 보았다. 닥터 리는 지금도 80대의 생존하시는 초대 이민자의 후손이다.

2003년 1월 13일은 미국(하와이) 한인 이민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추수감사절마다 많이 들어서 May Flower호와 그 배로 도착하였든 102명의 청교도들, 그들이 겪은 고생은 잘 알지만 우리들은 우리 선조들의 역사는 알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말하고 싶다.

20세기가 시작하는 2000년대의 초는 미국은 T. 루스벨트 대통령 때이다. 포드의 첫 자동차 공장이 세워지고 라이트 형제는 첫 비행기를 성공적으로 시험 비행하였다. 프로이드의 "꿈의 해석"이 첫 출간되었고 세기의 테너 카루소는 첫 녹음을 하였고 아인슈타인의 어려운 이론이 발표되었다.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이겼고 노일전쟁에 진 소련은 혁명 전야로 북적였다. 이 틈에 일본의 한반도 영향은 차차 더 강해지고 조선의 고종은 대한제국 고종황제라고 부르며 독립을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2000년 초 한반도는 동학 혁명과 청일, 노일전쟁의 영향과 몇 년의 홍수와 한발로 흉년이 된 농사로 민심은 흉흉하고 먹고살기가 힘든 해였다. 더욱이 1902년은 호열자가 창궐하였다. 그래서 정부는 계획하였든 황제 등극 행사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1902년 12월 22일은 음력으로 동짓달 23일 월요일, 한국사람들은 동지 팥죽을 준비하는 날이었다. 이날 아직 제물포라고 부르고 있든 인천항에서 하와이로 떠나는 121명의 첫 이민자들이 일본 배 "겐카마루?"로 세찬 눈바람이 부는 제물포항을 떠나고 있었다. 후일 미국 측 기록에는 이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동리의 산마루가 보이지 않든 거리까지도 가 본 일이 없든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기록한 것을 보았다.
항구에는 갓 건설 된 경인 철도를 타고 온 한국 이민국인 "수민원" 총재 민영환과 고관들 그리고 미국 이민회사 책임자인 David Dasher등이 와 있었다.

1905년의 George Jones목사의 기록에 보면 바다에 나간 배가 제물포항이 아직 눈에 떠나지 않든 그 때에 제일 먼저 이 사람들이 한 것은 함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이 배에 탄 사람들의 80프센트가 기독교 교인이었고 2사람의 통역은 실제 전도사들이었다. 이 배는 고베(어떤 기록에는 나가사끼)에 도착하였고 121명중 개인 사정과 질병 등으로 19명은 탈락하고 102명이(메이 프라워호와 비슷하다) 미국의 증기선 Gaelic호를 타고 10일간의 항해를 한 후 1903년 1월 13일 수요일 새벽 3시 30분에 호노루루항에 도착하였다. Dasher의 기록에는 통역 2명, 남성 노동자 54명, 그들의 처 여자 21명, 아이들 13명 젖먹이 12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은지금도 하와이에서 볼 수 있는 협궤 열차로 오하후섬의 와이아루아 프란테이션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첫 이민은 이루어졌다.

2. 하와이 역사와 이민
1776년에 James Cook 선장이 이 섬을 발견 후에 백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1810년에는 Kamehamea I에 의하여 원주민들의 통일 왕국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1893년에 사탕수수 경작주들에 의하여 쿠테타가 있었고 그들은 Sanford B. Dole을 대통령으로 세웠다. 그 후 1898년에는 미합중국에 병합되고 1959년 50번째 주로 되기까지 칼리포니아에 예속되어 있었다.

사탕수수에서 사탕 추출은 1802년에 시작하였으나 농업으로의 개발은 1830년 후의 일이고 1885년에 경작의 문제점들이 해결되어 대량 생산하게 되었다.
1852년부터 중국 노동자가 도착하기 시작하고 그들 숫자가 46,000명을 넘어섰다. 이중 일부가 하와이등 도시로 나가서 소규모 비지네스를 시작하자 위압감을 느끼고 중국인 이민을 1887년에 중단하였다. 그리고 1885년부터 시작한 일본인과 폴튜갈인 노동자들을 이 때부터 주로 선택하였다. 일본인 노동자도 중국인과 같은 이유로 1890년부터 이민을 중단하고 있었다. 일본인은1900년경 통계로 보면 60,000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신사협정은 양국간에 계속되어 가족들만 들어 올 수 있었다. 이것도 1924년 일본 배척령이 선포 된 후에는 중단되었다.

이런 때에 경작주들이 귀국한 한국의 선교사들을 통해 열심히 일하며 불평이 적고 성실한 한국사람들에 대하여 듣게 되었다. 여기에는 Horace Allen이란 분이 관여하게 된다. 이분은 1882년 한미통상 우호조약이 체결된 후, 1885년 주한 미국 공사관 공의로 부임하였는데 이 때에 민비의 조카인 민영익을 살려 준 일이 있었다. 이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을 설립을 허가하였고 한국 왕가와 가까워지게 되었다. 후에는 자신이 주한 미국 공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이 분이 1901년 휴가 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산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 사탕 경작주 연합회 사람들과 만나고 한국 노동자들 문제를 의논하였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에 온 알랜 공사는 고종황제에게 이민의 필요성을 말하고 민영환을 총재로 한 정부 기구로 "수민원"을 설립하였다. 또 알랜은 하와이 사탕 경작주들이 보낸 David Dasher에게 "동서개발회사"를 설립하고 이민을 모집하게 하였다.
노동조건은 다음 같다. (1) 일주일 6일 일하며 (2) 하루 10시간 노동하고 (3) 의무기한은 3년이며 (4)월급은 67원($15.00)이고 (5) 방세, 물세, 기름 값, 병원비는 고용주가 부담한다. (6) 단 주일날에 근무 시는 특별수당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외국이라면 전혀 모르든 겁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민에 아무도 응모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랜 공사는 한국에 나와 있든 선교사들의 도움을 요청하였고 특히 인천지역의 감리교 책임자였든 George Jones목사의 요청하였다. 죤스 목사는 교우들에게 돈도 벌 수 있고 특히 선진국에 가면 교육의 기회도 있다고 설득하여서 인천 내리 감리교회에서 만도 50명이 첫 이민 배를 타게 되었다. 또한 장로교 언더우드, 감리교 아펜셀라 목사님들의 도움으로 첫 배 다음부터는 원산, 평양, 대구, 부산, 목포, 마산, 등지에서도 이민이 있게 되었다.

1903년에 시작한 이민은 1905년 7월까지 132편의 이민선으로 7,843명이 오하후, 빅 아이랜드, 카우이, 마우이 등지에 오게되었다.
어느 배나 대부분의 배에서 기독교인들이 많았고 특히 한 두 사람의 교사 혹은 전도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배에 있었다. 첫 배에서는 제물포에서 50여명이 기도와 예배로 시작한 이민이 호놀루루에 도착할 때에는 교인이 58명으로 늘어났었다고 한다. 그들은 곧 일터에도 교회를 시작하였다. 1905년 에바 농장이란 곳에서는 135명의 교인이 300불을 헌금하여 농장주에게 교회를 건설하여 달라고 주었는데 감동한 농장주가 1,000불로 교회를 짓고 300불로 내장을 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보았다. 그들은 15불 월급에 2불씩을 헌금한 폭이었다.
한인들은 교회에 가까운 곳에서 살기를 원하였고 교회는 그들 생활의 구심점이 되었다.

1906년의 겨울에는 이미 13개의 예배당과 35개소의 전도소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또 교인들은 주일날 일하면 주는 특별수당을 위하여 주일날 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3. 이민생활의 내용
하와이가 미국으로 귀속된 후에는 합법적인 이민을 위하여서는 생활능력 증명이 있거나, 50불 이상을 지참한 자들만이 입국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한국이민들은 비합법 이민이었고 그 때문에 고용계약서가 없었고 구두 계약만 있었다고 한다. 입국 서류에는 모두가 50불을 소지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한다.

사탕 수수밭의 일은 정말 힘든 것이었다. 어떤 기록에는 "루나"라고 부르는 감독들이 말을 타고 채찍질을 하여서 몸이 안 좋아도 그들이 무서워서 4시기상 나팔과 함께 일하러 갔다고 한다. 그들 하루 일급은 75센트였다.
또 최봉윤 교수 ( UC at Berkley)의 기록에는 김태윤이란 1세 할머니의 이야기가 있다. 먹기 위하여 빈 마당에 옥수수를 심고 김치를 담아 먹기 위하여 채소밭을 일구고 틈을 내어 도살장에 가서 소 돼지 뼈들을 얻어다가 국을 끓여 먹었다고 한다. 남편과 뒷바라지하는 20여명의 노동자들의 밥을 하기 위하여 새벽 3시 반에 일어나서 밥을 짓고 낮 동안에 개울에 빨래하고 햇볕에 말린 뒤에 저녁 식사를 하였다. 저녁식사 후에는 빨래 다리미질을 하고 일이 끝나면 자정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자기는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였다.

일종의 노예 생활이었다. 하루 종일 밭에서 하여야 하는 잡초 뽑는 일, 수수 자르는 일은 힘들었다. 이파리 치고 수수대 쌓는 일은 여자들이나 큰 아이들이 하였다. 그러나 이것들을 차에 운반하고 차에 싣는 일은 제일 힘드는 일이었다. 영어를 좀 알아듣거나 눈썰미 있는 자들은 물 대는 일을 하였고 이는 가장 쉬운 일이었다고 한다.
어떤 농장은 잠자리나 먹는 것도 좋지 않았으며 병든 남편을 간호하든 어머니의 힘든 삶을 증언한 2세들의 이야기도 읽어보았다.

그래서 미국 교회에서 이를 조사하러 간 기록도 있다. Moore 목사는 배 삯과 지참금으로 선불한 돈을 계약상은 갚을 근거가 없는데도 한인들은 매월 월급에서 1불씩 때어 갚았다고 하였다. NY Ithaca의 Griffis목사는 1916년에 기록한 그의 보고에서 1년 최저 수입은 200불이었고 독신의 경우는 최저 생계비가 175불이 소요되어서 잘하면 1년에 75불을 저금 할 수 있고 2-3명의 자녀와 처가 있을 경우는 280불 수입에 250불의 생계비가 필요하다고 기록하였다. 1900년의 일당 평균은 75센트서 1불이었다. 그러나 한인은 평균 1불 50센트였고 고소득층은 3-5불이었다. 다른 기록에는 1904년 7월에 일부 한국인들이 285에이커 땅을 임대하고 농장직원 지시에 따라 사탕수수 임대 경작을 하였는데 이들의 수입은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한다.

이들 초기 이민자중 2000여명은 후일에 미 본토로 가고 그리고 938명은 귀국하였다고 한다.

4. 사진 결혼과 부인들
이민 후 초기에 건실하게 일하든 이민 자들도 심한 노동조건과 언어 풍습의 차이, 망국의 설음 등으로 인하여 음주, 폭력, 도박 등으로 차차 문제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농장주들은 이들 독신자들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사진중매라는 방법으로 여자들을 한국에서 다려오는 방법을 취하게 되었다. 사진을 보내고 받고 하여서 중매를 하는 방법이었다. 이때 기혼자들은 그들의 부인들을 다려오게 되었고 이들은 약 300명이었다.
1910년 12월 2일에 시작된 사진결혼은 1924년 5월 15일 동양인 배척법안이 통과 될 때까지 14년간에 영남 출신이 951명이 오고 이북 출신으로 105명의 여자들이 중국 상해를 경유해 들어왔다.

사진 결혼한 여자들은 고등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대부분 초등 교육은 받았고 또한 대부분이 기독교인들로서 세례를 받고 주일학교와 교회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외국까지 올 정도로 진취적인 20대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하와이에 도착하여 본 것은 낡은 사진에 있든 남자가 아버지의 나이와 같은 연배이고 교육도 못 받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결혼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또 결혼한 후에도 남자들이 과로와 나이 탓 등으로 일찍 죽고 나자 그 때만하여도 한국 같으면 불가능하였겠지만 이 젊은 과부들은 재혼을 흔히 하게 되었고 재혼은 외국인들과도 하게 되었다.

2세인 에스터 권(75세)씨는 그의 어머니를 기억하면서 다음 같이 말했다. "미국에 가면 공부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어머니는 18살에 하와이에 왔어요. 그런데 도착해보니 너무 가난해서 충격을 받았대요. 하와이에 오기 전까지 한번도 음식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분이 이 곳에 오자마자 일꾼들의 음식을 만들고 옷을 빨면서 돈을 벌어야 했지요" 그의 어머니 이혜경씨는 6살 많은 남편과 결혼하였지만 행복한 편이었다. 사진신부 임수이씨의 딸 이수명 (87세)는 아버지와 나이 차가 20세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줄줄이 여섯이나 되는 아이를 낳을 동안에 아버지는 벌써 늙어 버렸고 혼자서 가정의 책임과 아이들을 키우는 일을 하게 되었다. 낮에는 사탕수수 농장 인부들의 밥을 하고 돌아오면 아이들을 돌보면서 밤늦게까지 재봉공장에서 받아온 옷에 단추 구멍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에게 대한 교육열은 대단하여서 2세들이 기억하는 것은 보기만 하면 공부하라는 것이었고 조금 자란 뒤에는 어설프게 "....알지?" 하는 식으로 말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교육열은 지극히 높아서 인구비례 고등 교육 율은 같은 레벨에 도달하는데 중국인은 55년, 일본인은 37년 그러나 한국인은 5년만 걸렸다고 한다. 많은 한국인 1세들은 큰 고생을 하였으나 2세들의 대학교육을 어려운 중에도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