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VH

나는 음치거나 지극히 음치에 가깝다는 것을 최근에 와서야 더 절실히 느낀다. 옛날에는 제법 크라식을 아는체하고 어떻게 돈이 생기면 음악 감상실 한쪽 구석에서 얼굴을 베토벤 비슷하게 꾸겐 모습을 하고 앉아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나는 그렇게 고상하지도 않다는 것을 차차 깨닫게 되었다.

또 어떻게 된 셈인지 외국 생활을 오래 하니까 가곡 보다는 가요곡이 더 좋다. 쉽게 생각해서 흘러간 옛 노래 팬이라야 할건데 그렇지 않고 인터넷 덕으로 장나라의 Sweet Dream이나 송윤아의 분홍 립스틱 같은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노래를 잘 한다거나 아는 것도 아니다. 내가 노래를 끝까지 외우고 있는 노래라고는 찬송가 외에는 가곡이나 가요 중에서도 하나도 없다.

내가 음치일 것이라는 생각이 돋아 난 것은 이 찬송가 부르기 때문이다. 오랜 동안 성가대를 하며 곡들을 볼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나이 탓이라고 궁한 이유를 대지만, 찬송 부르는 중에 은혜가? 충만해지면 이게 어떤 때는 말 달리듯이 정신 없이 빠른가 하면 음정도 안 맞게 크다란 소리로 한두 박자식 길어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문제는 내가 사회를 할 때이다. 불상한 반주자는 마이크 앞에서 큰 소리로 불러가는 찬송을 맞추기가 지극히 힘든 모양이다. 고생하든 반주자가 뭐라고 우리집 사람에게 이야기했는지 집 사람에게 몇 번 크게 야단을 맞았다.

그 다음부터 손으로 박자를 새어가면서 일절 까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어떻게 불러 보는데, 찬송가란 묘한 것이어서 일절쯤 부르고 나면 가슴 속에 뭉클하고 올라오는 무엇이 있어서 2절에서부터는 또 제멋대로이다. 변명 삼아 야단 맞을 때면 “찬송은 은혜롭게 부르면 되는 거야!!” 하면서도, 하도 야단이 무서워서 이러다가는 교회도 가기 싫게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된다.

몇 년 전 일이다. 환자를 보는데 이름이 Mahler이다. 아아 독일 사람이구나. 생각하면서 옛날에 내가 좋아하든 음악가 중에 Mahler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혹시 그런 이름을 덜어 본일이 있는가? 하고 물으니까 이 사람이 한술 더 떠서 한다는 소리가Gustav 를 이야기 하느냐고 묻는다. 어떻게 아느냐 하니까, 할아버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느냐고 되묻는다. 이름이란 참 묘한 것이다. 우리는 그 이름 때문에 즐거운 한시간을 갖었다.

우리 며느리가 시집 왔을 때에, 그가 장성한 곳이 오하이오 어느 곳이라서 영 한국 말이 옳지 않았다. 전화를 받으면 “아빠! 엄마 집에 있어…….요”한다. 아직도 그렇게 부르지만, 같은 나이의 우리 딸도 내 보고 아빠라 부르고 마흔이 넘은 아들도 아빠라 부르는 것이라서 혼자 참 좋은 호칭이다고 치부를 해 두었다.

며느리는 결혼 후 몇 년을 일이 끝난 시간에 퇴근을 하고 저녁 8시나 9시쯤부터 일주일에 3일씩 열심히 한국말을 배우러 다니 드니 지금은 간단한 대화는 지장이 없다. 그렇지만 제 얘들에게 한국말로 “밖이 추우니 외투입고, 장갑 입고, 양말 입고 모자 입고 나가라”하고, 돌아서며 “엄마 무슨 향수 입었어요” 하는 것을 천연덕스럽게 한다. 한번은 고쳐 주었지만 영어의 wear라는 말이 그렇게 복잡하게 한국말에서는 바뀌어지는지 배우기가 힘이 드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제 부모님들이 사용하시든 “이 딴 것, 저 딴 것”같이 묘한 함경도 사투리는 곧 잘한다.

이 며느리가 첫 얘를 낳았다. 성은 미리 정해졌으니까 문제가 없고 이름도 저희들이 지었으니까 괜찮은데 어떻게 알았는지 미들 네임은 항열을 따라서 내보고 한국 이름으로 지어 내란다. 내가 작명가도 아니고 이름 짓기가 그리 쉬운가, 더군다나 뭐 계집 얘인데.. 라고 혼자 생각을 했지만, 입을 열었다가는 여권이 샌 우리 집에서 저녁 얻어먹기도 힘들 판이다. 그래서 재영이라 지어 주었다. 뜻을 묻길래 얼버무리면서 예쁘다는 뜻이라 해 두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딸이 이태리 남편 사이에 아이를 낳았을 때이다. 이 놈도 할아버지가 마땅히 한국식 항열에 맞추어 이름을 지어내란다. 그같이 친손자도 지어 주었으니 자기들도 마땅히 받아야 한단다. 이건 무엇이 잘 못 되는 것 같은데,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체 재현이라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 다음 놈들은 재선, 재윤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이러다간 온 동네 사람이 모두 우리 항열에 맞추어 작명 해달라고 오겠구먼…..차라리 작명가로 나설가?” 고 혼자 주얼 거리면서….



유대인들도 그 이름을 지을 때 그 뜻을 우리와 같이 깊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지었음을 창세기, 출애굽기로 내려 오면서 보면 알 수 있다. 아담이나 헤와 부터도 그렇지 않는가.

한편 우리 성경에는 이름이 있어도 부르지 못하는 이름이 있었다. 그게 여호와란 하나님의 이름이다. 오래 전에 성경을 보다가 다음 성경 구절 때문에 이를 알려고 히브리어 사전을 뒤지다가 알게 된 것이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 61:1)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 한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 (눅 4:18)

위에 기록 된 누가 복음의 이사야서 인용은 한가지 틀리는 점이 있다. 그것은 여호와란 단어가 인용 시에는 탈락된 것이다. 사실 우리 구약은 원래의 히브리어에서 번역되었고 누가복음은 아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된 헬라어 판 70인역 (Septuingist)에서 인용 된 것임으로 차이가 난다. 성경은 글자 한자 틀리지 않게 번역 될 것인데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이것은 처음 내가 성경을 읽으면서 가진 의심이었다.

JHVH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의 이름이다. 예수님 오시기 수세기 전부터 율법을(출 20:7, 레 24:11) 잘못 이해한 결과인지 오랜 미신적인 관습으로 인지 여호와란 이름이 너무 거룩하여 소리 내어 읽지 못하고 기록하지도 못하게 되었다. 기록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히브리 원문 외에는 번역문일지라도 입으로 발음 하는 것과 같이 취급 되어서 그렇다. 그래서 성경에 여호와란 글이 나오면 읽을 때는 "주님" 즉 Adonai 라고 읽게 되었다.

이 같은 이유로 헬라어 번역시는 Kurios 또 라틴어에서는 Dominus라고 번역하였다. 물론 영어에서는 Lord로 번역되어 있다. (현대의 유대인들의 글에서는 주님이란 단어는 여호와란 단어와 동의어로 생각되고 단지 기도 때에만 사용된다고 하였다. 그 외의 경우에는 ha-Shem 혹은 Adoshem이라고 읽으며 하쉠은 "이름"이란 뜻이다. 아도쉠은 아도나이와 하쉠의 합성어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사야 61:1 같이 "주 여호와의 신이"라고 기록되었을 경우로서 만약 읽는다면 "루아흐 아도나이 아도나이(여호와 대신)" 라고 읽어서 주님이란 단어가 중복된다. 그를 경우는 "아도나이 엘로힘" (엘로힘은 엘의 복수로서 항상 성경에서는 복수로 기록되어 있다. 엘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데로 아랍인들의 알라와 같이 하나님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이다.)으로 읽게 되어있다.

그 결과로 헬라어 번역시에는 원래 "주 하나님의 신이 내게 임하사"로 되게 된다.

또 히브리 글에서 모음이 고대에서는 없었기(점과 짧은 선으로 표시된 현재 사용 중인 모음은 중세 이후부터 사용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JHVH란 글이 나올 때마다 아도나이로 읽어 오다보니까 JHVH의 발음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를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를 알려고 하고 "여호와" "제호봐" "야웨" "야훼" "야붸" 등등으로 읽는 다는 학설들이 많다. 그러나 현재는 "야훼" 혹은 "여호ㅂ와"란 발음이 정확하지 않겠느냐는 주장들이다.

간혹 New York Times의 보수 유대인들의 광고에서 보면 "God" 대신 "G-d"라고 기록한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도 같은 이유에서 출발한 것이며 대부분의 유대인들도 아무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또한 우리 성경에도 여호와를 주님으로만 번역하여 기록한 성경 번역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