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 조금만 웃으시면 안...될까요?
아버지 날 선물로 애들이 5년이 넘은 내 늙은 콤퓨더를 신형으로 교체하여 주어서 좀 쉬었다. 그러나 아직도 집안 콤퓨터들의 LAN 정리가 끝나지 않아서 두 대를 함께 책상 위에 두고 신형으로 한국 방송을 보고 들으면서 옛 것으로 글을 쓴다.



몇일 전이다. 아침 출근 길에 잠시 한국 Radio에서 들은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이다.

어느 교회에서 흥분한 성가 대원들이 당회에 찾아와서 성가대 대원인 한 자매님이 “주부 가요 경연 대회’에 나가서 우승하고 한국에서 있을 결승전에 나간다면서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성가 대원들이 흥분하는 이유인즉 이런 세속적인 사람과 거룩한 성가대의 자리에 함께 앉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해가 될만한 이야기 같기도 하였다.

내가 20여년 넘게 성경공부를 가르치든 청년들이 지금은 장년이 되었고 일부는 목사님 장로님들이 되어서 뉴욕에서 “友情 선교회”란 선교회를 조직하여 이런 저런 일에 도움을 주는 일을 하고 있다. 한번은 모임에서 뉴욕의 유명한 음대를 나와 테너를 하는 한 회원과 다른 회원들간에 의견에 차이가 있는 대화를 한 일이 있다. 그 분은 참 된 찬양은 찬송가나 크라식이라야지, 복음성가 같은 것은 참 성가가 아님으로 아무 때나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긴 요사이 복음 성가들은 세속적인 노래들과 차이가 하나도 없으니 할 말도 없었지만 ….. ) 전문가의 단호한 말에 모든 회원들은 조금 불만스러운 것 같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가곡은 불러도 괜찮은데 가요는 안될까? 가사만 생각하여 거룩한 노래만 불러야 된다면 가곡도 가요와 같은 문제가 있고 오페라에 가면 가요 보다 더 야한 노래도 한 없이 많지 않는가?

옛날 내가 아는 분 중에 아마추어로 음악을 좋아하시든 김계욱 선생이란 분이 있다. 사촌인 김계원 장군과 같이 음악을 아주 좋아 하시는 분이었는데, 원주에서 우리가 기독교인 합창단을 조직하고 모였을 때 그 분이 지휘를 하였다. ‘은혜시럽게’ 합창을 한 노래가 그 분이 편곡을 한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하든 노래였다. 내 믿음이 옳치 않아서 인지, 가사만 생각한다면 찬송가에 준하는 노래였다고 생각된다.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톤의 전기를 영화한 것을 옛날에 보았다. 아프리카 초대 교인들, 그들은 찬송을 할 때에 맨발로 뛰고 나무작대기를 쥐고 춤을 추면서 그들 식의 즐거운 찬양을 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그들이 그렇게 유치한 방법으로 찬양을 하는 것은 그레고리안 성가를 들어 본 일이 없어서 그렇겠지…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그 사람들에게는 그 방법이 가장 기쁜 마음으로 찬양 드리는 것이라면 이해가 되어진다. 꼭 서구식 찬양 만이 거룩하다는 것은 나에겐 무엇인가 모순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도 다 그렇지만, 교회들은 너무나 흑백 논리에 젖어 있고 그리고 교단은 쪼개어 지고, 또 그렇게 사회를 가르쳐서 한국 사회 전체가 타협을 모르는 세대로 도배질 하게 되었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우리는 은혜의 세대에 서서 구약적인 교조주의에 너무 깊숙하게 발을 담그고 있디. 예수님이 그렇게도 싫어하시든 외식, 형식주의가 우리 코를 뀌어서 끌고 가고 있다.



오늘도 잠시 서울의 기독교 방송국의 뉴스 프로그램을 중개하는 것을 보았다. 무슨 의논인지 모르지만 목사님들의 회의가 있었다. 항상 그렇지만, 그런데 왜 목사님들은 웃을 줄을 모르실까? 왜 그렇게 심각할 수 밖에 없으실까?. 기쁨이 넘치시는 얼굴을 한 분을 한 분이라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항상 죄 많은 어린 아이들 같은 교인들을 생각하여야 되니 어떻게 얼굴이 피어지겠나 하면서도 그런데 그렇게 고생하든 바울 사도는 기회 있을 때마다 왜 항상 기뻐하라고 강조를 하였을까? 혼자 생각하여 본다.

다른 이유도 있을 것 같다. 목사님들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시는 분들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바울 같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하시기를 원하시는 분들이시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르는 것이지 않은가?

그런 이유는 아니기를 바라지만, 성경에 예수님은 한번도 웃으셨다고 기록된 곳을 본 기억이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우셨다고 한 구절이나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셨다는 구절은 본 기억이 있다. 그래서는 아니겠지만….믿음 좋은 지도자 목사님들이 미소를 띄우는 대신 왜 배토벤 같이 슬프고 심각하게 꾸긴 얼굴을 하여야 되는지를 이해 할 것 같기도 하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웃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는 부정적인 이메이지 위에 기록된 것이다. 아니, 대부분의 성경의 기록은 웃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우는 자가 복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성경의 웃음은 비웃음 같은 색체를 띄운 뜻으로 기록된 곳이 너무 많다.

우시는 예수님의 이메이지는 인간들의 죄와 죽음에 대한 슬픔이셨다. 같은 뜻으로 본다면 목사님들도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심각한 모습들이 우리들의 교회를 잔치 집으로 만드는 대신에 슬픔과 실패한 자들의 한 푸리 장소로 만든 것은 결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여 본다.

지금 나는 목사님들 흉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문제를 한번 회개하고 싶어서 이다. 이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어린 아이 때의 믿음에서 벗어나서 원숙한 믿음을 갖게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어떻게 좀 늙을 수 있을까?. 예수 믿는 일도 좀 여유를 갖고 믿으면 얼마나 좋을까?

미국 대법원 여성 초대 판사인 Sandra Day O’Connor 란 분이 한 말이다. 이 할머니는 금년 73세이다. “젊은 여자일 때 나에겐 모든 것이 걱정 거리였다. 옷을 어떻게 입을까? 머리를 어떻게 꾸밀까?…… 늙는다는, 가장 큰 한가지 축복은 이젠 아무런 이런 종류의 걱정들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축복을 멀리 하지 않고 마주 할 수는 없을까?

예수를 처음 믿을 때 모든 것이 문제였다. 제사 음식 , 고기 먹는 문제 , 술 마시는 문제, 과격한 운동 문제, 안식일 문제, 돈 빌리는 문제, 애인 사귀는 문제……이제 우리도 나이 든 입장에서 생각하요 보자. 이런 사사한 문제들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잊어버려서야 되겠는가? 우리도 믿음 안에서 늙을 때 좀 변해야지 않겠는가? 비 타협적인 선이 아니면 악이라는 한국 교회의 문제는 한국 사회문제의 원인이다. 이는 바로 교회가 책임져야 할 문제이지 않을까?.눈을 들고 산을 바라보자.

로마서 14장에는 이 문제에 대한 비슷한 해답 말씀이 있다. 믿음에도 흑과 백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흑도 백도 아닌 것이 있다는 뜻으로 이야기한 성경 구절들이라고 나에겐 생각 된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하지 마라…...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믿음으로 쫓아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롬 14:1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