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와 감사절 이야기|♤이상국의 신앙이야기
이상국 |  | 04.04.24 10:25 

오늘 11월 27일, 11월의 마지막 목요일은 미국의 추수 감사절이다. 미국의 명절 중의 하나로 큰 아이의 식구들은 시카고로 처가 방문에 갔고, 얼바니에서 딸네 식구들이 왔다. 딸과 사위가 크다란 터키를 오븐에서 구울 동안 나는 감자를 어게면서 “감사”를 생각한다.
가을의 추수가 끝나는 절기에는 세계 어디에서나 비슷한 감사의 절기를 지키고 있다. 우리의 추석이나 유대인의 초막절이나 근본 뜻은 같다.

Thanksgiving day란 감사를 돌리는 날이다. 이 감사절은 하나님께 감사를 올리고 “내 이웃”에게 축복을 나누는 (giving) 날이란 뜻이 아닌가?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 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꼐 연락하되…..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 할 지니라” (신 16:14-15)

근대적인 감사절은 미국의 청교도들이 마사츄셋츠의 Plymouth에서 행한 1621년의 축제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많은 채색된 이야기들로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들은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부분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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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많이 들었든 이야기와 다른 청교도와 감사절 이야기를 오늘은 하고 싶다.

1517년 마틴 루터의 선언문 뒤부터 종교적인 소용도리는 구라파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 중에 영국의 헨리 8세는 카다린과 결혼을 반대하는 교황청에 대항하여 1533년에 영국교회는 카도릭에서 독립하고 자기가 영국 교회의 수장임을 선언하였다. 이로서 성공회가 영국의 국교로 선언되었다.

1500년대 까지 교회들은 성경이라고는 라틴어역 성경 뿐으로 신부들은 이를 읽고 번역하여 교인들에게 들려 줄 뿐, 교인들이 영어로 된 성경을 드물지만 바로 읽을 수 있었든 것은 1600년대 초기에 제네바에서 영어 성경이 나온 후이다. 킹 제임스판 성경은 17세기에 나오고 이 성경의 대중화가 카도릭과 영국교회의 형식주의를 비판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영국은 국교로 성공회가 자리잡고 있었으나 뒤를 이은 “Bloody Marry”라는 여왕의 친 카도릭 회귀와 그 후의 에리자벳 1세의 다시 성공회의 권위가 세어 질 동안 많은 선각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예배가 바꾸이기를 기대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국교인 성공회 안에서 교회를 정결하게(Purify) 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들을 청교도 (Puritan)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의 운동은 당시 성공회의 심한 탄압 아래서 고생을 하고 있었다.

1604년 엘리자벳 1세 여왕이 죽고 스콧트렌드의 킹 제임스 6세가 그 뒤를 이어 영국의 왕이 되었을 때에 많은 청교도들은 Protestant인 그가 교회를 개혁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가 빗 나갔을 때 그들은 교회 안에서 개혁 하려는 Puritantism에서 떨어져 나오게 되고 영국 교회법에 대항하여 불법으로 그들의 교회를 독립 하려는 Separationist (분리주의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국교와 정권의 탄압으로 영국의 Scrooby에서 모여서 종교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차차 더 호전적인 형태의 극단주의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1607년 경에는 견디지 못한 많은 분리주의자들이 어렵게 영국을 빠져 나와 화란의 Leiden으로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화란은 그들의 청교도적인 신앙을 지키기에는 힘든 장소였고 또 그들이 행한 반 영국 교회적인 출판 활동 등이 화란 정부를 통한 영국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한편 스페인과 화란의 좋지 않은 관계도 전쟁의 위험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바라 보게 된 곳이 1500년대부터 탐험들을 하고 있든 신대륙 미국이었다. 1620년 그들이 신대륙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구입한 Speedwell이란 어선으로 도로 영국으로 와서 Mayflower라는 배로 갈아타고 31일간의 항해 끝에 신대륙에 도착하게 되었다.

영국의 London Virginia 상선회사에서는 투자가들이 이들에게 미국의 버지니아의(그들은 지금의 버지니아가 아니고 모든 동부 해안 지역을 버지니아라 불렀다) 허드손 하구(지금의 뉴욕시)에 보내 준다는 조건으로 돈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화란을 떠나 2달 후에 도착한 곳은 마사츄셋츠의 해안이었다.

메이프라워호는 102명의 손님과 30명의 선원이 승선하여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청교도들 (엄밀하게는 분리 주의자) 은 아니었고 41명 만이 청교도들이었다. 나머지는 불란서인, 폴란드인등과 신앙과 전혀 관계 없이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나이는 57세가 제일 고령이었고 대부분이 30대 이하였다. 물론 10대와 어린 아이들도 30여명이 있었다.

1620년, 그의 식량도 떨어져가는 11월에 상륙하였을 때는 겨울을 지날 집을 짓는 것이 급했다. 그리고 조금 남은 식량을 절약하며 살아가야 하였다. 그 해가 지나고 다음 해 봄이 되었을 때에는 그 중 반의 사람들이 병과 추위와 기아로 사망을 하였었다. 그러나 그들은 Puritan들의 "거룩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참고 견디었다.

1502년경부터 신대륙의 동부 해안에는 폴튜갈, 스페인, 이테리 등을 포함한 구라파의 배들이 더나 들면서 금과 부를 찾아 헤맸고 중세 때부터 그들이 하든 장사 중의 하나인 노예상의 일을 하였다. 그들은 미 본토인들을 잡아서 구라파에서 팔았다. 그래서 동부 해안에 살든 인디언들은 구라파의 사람들에게 적대적이 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때로는 서로가 공격을 하여서 많은 살상자를 내기도 하였다.

1605년, 청교도들이 도착하기 15년 전에 John Weymouth라는 선장이 잡은 인디언 중에서 5명을 영국에 다려 갔는데 그들은 이 사람들을 비교적 잘 대접하였고 영어를 가르쳤으며 세례를 주었다. 그 중 한 사람이 Squanto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모험을 하고 영어를 배우고 난 뒤, 뉴 잉그랜드 지역으로 돌려 보내었다. 그러나 1914년 경에 그는 다시 Hunt라는 노예선 선장에게 잡혀서 구라파로 다시 가게 되고 스페인의 노예상에게 팔렸을 때에 선한 프란시스칸 수도사를 만나 구함을 받었다. 구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갈 수 있었고 Squanto는 다시 만난 Weymouth 선장의 도움으로 고국인 신대륙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1620년 Pilgrim (미국에 간 첫번 separationist…Puritan)들이 도착 했을 때 그들은 영어를 구사하는 Samoset 와 Squento라는 두 본토인을 만나게 되었고 Squanto는 양식이 부족한 그들에게 연어와 청어를 잡는 법과 그들이 구대륙에서 가져 온 밀이 잘 자라지 않는 땅에서 처음보는 옥수수를 심고 키우는 방법, 조개며 고기를 잡는 방법, 무진장 한 청어를 퇴비로 사용하는 법등을 가르쳐 주었다. Squanto의 영어 구사 능력은 그의 완전하였었다. 그는 또 많은 딸기 종류와 과일 그리고 넛 종류의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또 그들은 들판에서 산양을 하는 법까지 알려주고 도와주었다. 그는 그들과 함께 가까이 있으면서 인디언식 둥근 지붕의 집 짓는 법을 가르쳐 주고 그들을 위하여 이민자들과 본토안 간의 통역, 외교적인 일까지 하였다. 또한 Wampanoag라고 불리든 지역 인디언 왕(추장)인 Massassoit과 사이에 평화조약을 체결하게도 하였다.

1621년 11월이 되었을 때에 1년에 병과 추위 기아로 과반수가 죽는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남은 감사 속에서 Squanto와 그들의 식구들, 그리고 추장을 초청하였을 때에는 놀랍게도 90여명의 인디언들이 왔다. 이때 음식이 부족한 것을 본 추장은 사람들을 보내어 5마리의 노루와 많은 터키, 닭 그리고 콩과 옥수수들을 갖고 와서 함께 3일 간의 큰 축제가 열리었다. 실제 청교도들은 초막절과 같이 1주일을 잔치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또 다른 기록에는 지금 우리들이 생각하든 것과 같은 그런 종교적인 감사절은 아니었으나 결과는 서로가 받은 축복을 나눈 것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1620년 경에는 구 대륙에서 사람들이 가져 온 흑사병과 마마의 유행으로 이 지역에 거주하든 많은 본토인들을 죽였다. 결과로 1618-1620년 경에는Wampanoag라 불리든 이 지역 본토인들은 적은 수만 생존하고 대부분이 죽게 되었다. 그렇지만 청교도 이민자들의 기록에는 이후 54년간 본토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이민자들이 살고 있었다고 하였으나 본토인 인디언들의 기록에는 그들은 밀려나서 대대로 살아오든 그들의 땅과 산양 터를 잃게 되고, 후손들은 그의 멸종을 당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1620년에 Wampanoag 부족은 12,000명이었으리라 짐작되나, 1675년에는 1,675명 그리고 한 때는 400명으로 줄어들었다. 그 이면에는 청교도가 아닌 사람들은 사탄의 자식이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건설하는데 지장이 된다는 극단적인 기독교 보수주의자와 더 넓은 땅을 차지 하려는 장사꾼들과 감사를 잊어버린 식민주의자들의 생각이 동행이 된 때문이라고도 한다.


다음은 Pilgrim이 신대륙에 온350주년 기념식이 있었든, 1970년 추수감사절에 마사츄셋츠 식장에서 Wampanoag의 한 후손이 축하 의뢰를 받고 한 말이다.

“오늘은 당신들이 축하 할 날이다….미국에 처음 백인들이 도착한 날을 돌아보는 날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날이 아니다. 이 날은 나의 동족에게 일어난 일을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보는 날이다. Pilgrim 들이 도착했을 때에 Wampanoag의 사람들은 이 날이 그들에게는 마지막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들은 두 팔을 벌려서 그들을 환영하였었다. 50년이 지나가기 전에 Wampanoag는 이미 부족으로 존재 할 수가 없었다. 우리와 우리 주위의 부족들은 총과 당신들이 갖아 온 질병으로 죽어갔다. 이제 우리 함께 항상 기억 하자. 우리 인디언들도 백인과 같이 다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감사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우리들은 Thanksgiving day를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