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간 쉬면서
날이 따뜻하여 지면서 뒷마당의 잔디가 더 푸르르지고 집 앞에 키 큰 카나디언 단풍나무의 새 잎들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뒷 마당 가에 있는 작은 터밭은 작년에 꼬추와 오이를 심었든 자리에 잡초들이 돋기 시작하였다. 터밭을 치우고 땅을 파서 엎다가 꿀밤(도토리)이 노란 새싹을 터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집 주위에는 꿀밤나무와 단풍 나무들이 좀 있어서 거기서 사는 다람쥐들이 제법 있다. 가을이 되면 이 다람쥐들이 꿀밤을 물어다가 앞발로 정성것 땅을 파고 돌아서서 뒷발로 꽁꽁 묻고 그위에 지푸라기나 나무 껍질등으로 위장을 하는 것을 창문 밖으로 종종 볼 수 있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다람쥐는 한 구멍에 한개씩의 꿀밤을 묻으며 한마리의 다람쥐가 가을에 2000개 정도의 꿀밤을 묻는다고 한다. 아마 그들도 나 같이 그 모든 자리들을 기억 못하여서인지, 봄이 되면 곳 곳에서 돋아나는 꿀밤나무의 새싹들을 보게된다. 정성것 하나 하나 꿀밤을 묻고 있든 다람쥐를 생각하며, 얼마 전에 보았든 한 신문의 기사를 기억한다.

아직 박찬호가 Dodgers의 pitcher로 있을 때이다.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개임에 나갈 때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금년에 MVP를 목적 하는지, Dodgers가 우승이 목적인지...같은 질문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마운드에 설 때에는 다른 아무 생각도 없읍니다. 단지, 손에 쥔 이 한 볼만을 어떻게 최선으로 던질지만 생각합니다고 한 말이었다. 내가 알기엔 그는 크리스찬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종교인의 말보다 내 가슴에 닿는 것이 있었다.

몇번의 글을 쓰면서, 나를 도리켜 본다. 내가 하나 하나에 최선을 다 했는지를... 그처름 내 인생에도 나의 전력을 다 했는지를     .
예수님도 잃어버린 한마리 양, 어린 아이 하나, 엽전 한냥...물 한그릇의 자선 등을 잊지 않으시는 분이셨다.

글을 쓰면서 나대로의 몇가지 마음에 가진 뜻은 있었다.

1. 교리와 틀에 안 매인 초대교회 때의 믿음과 관심을 나타내고, 그 뿌리들에 가까워 지고 싶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의 문안 말씀 같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편안하여 지는 것임을 나타내고 싶다.
3. 인생을 '산다는 것이 믿는다'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자랑 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그냥 솔직한 인간이고 싶다.
4. 이국 생활을 오래하여서, 여기 생활과 가족들, 생각들, 인간적인 냄새들을, 조금이라도 고국의 분들께게 알게 하고 싶다.
5. 가능하면 딱딱한 이야기도 웃으며 읽을 수 있는 여유 있는 글 쓰기를 배우고 싶다.

그러나 결과는 모르겠다. 두분의 Feedback은 있었지만 선배 대접인지 ....
늦게 배운 영어도 요사이는 자꾸 잊어버려 가는데, 한국말과 글이야 말할것도 없다. 솔직하게 말은 알아도 어감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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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날은 예배 사회를 하면서 울먹여서 예배 후에 청년들이 "장로님은 왜 그렇게 자주 우십니까?" 한다. 챙피 하지만 나는 자주 운다. 이젠 남자가 왜 그 모냥이냐고 할 만큼 감정을 주체 못할 나이도 아니다. 일년에 한번이나, 부흥회 때나 속 후련 해질려고 우는 것이라면 이해가 되겠는데 그것도 아니다. 그런데....

그간 우리와 함께 지났든 성가대 지휘자 김집사가 내일 한국으로 영구 귀국한단다. 만하탄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 했고 작년에 어려운 가운데도 석사 과정을 마쳤다. 아직 미혼이다. 널씬한 키, 가냘픈 몸매, 갸름한 얼굴 아름다운 소프라노의 아가씨다. 우리 막네와 한 동갑으로, 실 없는 이 장로가 "김 집사 사랑해"하면 " 주 안에서"라고 대답할 정도로 신앙도 좋다.
교회 교인이 열사람도 안될 때 우리 교회에 와서 성가대를 조직하고 8년을 지났다. 감동적이든 그 첫날 그가 부르던 성가를 아직 나는 기억한다.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눈길을 반쯤 하늘을 향하고 영혼으로 찬송하든 처녀의 그 맑고 아름다운 표정은 잊을 수가 없다.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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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김집사는 육체적으로는 시각 장애인이다.

"장로님 제가 세살 때 눈이 안보이게 되었지만. 하나님이 다른 눈을 뜨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런 분이다. 간혹 우리 집이 있는 교외로 올 때는 호수의 물 색갈과 붉고 노랗게 물든 단풍나무의 그림자를 설명해 달라하고, 집에 피어 있는 난초 꽃을 설명하면 손으로 드듬고 그 내음을 맡기를 원하였었다. 그런 김집사가 내일 귀국한단다.

우리 김집사는 예수 믿지 않고 여유가 없었든 시골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예수를 믿게되고 맹아학교를 거쳐서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무일푼으로 겂도 없이 유학을 왔다.

뉴욕에서는 도와 주시는 독지가와 조금의 교회 보조금 등으로 고생하면서 대학원을 끝내었다.어려울 때도 말이 없고 표정이 밝으니 짐작 할 수도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라면 한 상자로 몇주일을 사는 그런 생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간혹 연주회에 나갈 때면 화장을 혼자 하기 힘들어 우리 집 사람의 손을 빌린다. 따라가 보면 깨끗하고 잘 정돈 된 것이 우리 아이 방보다 더 밝은 아가씨의 방이다.

그는 그 동안에 교회의 지휘자로 영주권도 받었고 몇일 전에는 시민권도 받았다. "국가 보조금도 나오고 여기서 살아도 괜 찮을 터인데...?" 하니 "여기서는 내가 받은 것으로 갚을 수 있는 일이 없어서..."한다. 아직 한국의 직장도 확정이 되지 않았단다. 적은 교회의 성가대 지휘나 독창자로 자리는 있는듯 하나, 자신이 다니든 학교에 자리를 갖고 싶지만 자리는 확정 되지 않은 듯 하다.

여기 있을 동안에 간혹 간증이나 독창자로 교회들에 소개도 하여 주기도 하였지만 별로 개인적으로 도와 준 것이 없는 것이 가슴에 저민다.
관절염이 심한 우리집 사람이 어깨나 팔 다리가 아프다면 맹아학교에서 안마를 배워서 자기도 자격증이 있다면서 즐겁게 도와주었는데.

귀국을 결정하고 한국에 가서 살 생각을 하니 또 다른 걱정이 다가 온다고 한다.
만하탄에서 불편 없이 살고 지팡이만 갖고 어디나 다 다닐 수 있었고, 어려우면 누구나 도와줄려고 하는데서 살다가, 가는 한국이 얼마나 변했을지가 걱정이란다.

아침에 길을 가고 싶어도 "오늘도 시작부터 봉사를 보고 ..툇 툇, 재수 옴 옮았네" 하는 사람들로 길이 막히는 곳에서 이 착한 김집사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하면 나도 걱정이 된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계셔
위태한 길 면케하고 품어 주시기를 바라네

예수님 앞에서 다시 만날 그날 까지...